이 글은 단순한 족보의 기록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지식인의 위대한 투쟁기이다.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 선생의 생애와 덕행을 기록한 유사(遺事)는 선생의 학식, 효행,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의 지혜와 애민 정신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명문이다
한문으로 된 글을 번역해보면 아래와 같다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 선생 유사(遺事)
이관집(李觀楫) 선생은 34세손(世)으로 자(字)는 연선(廷善)이요, 호(號)는 송은(松隱)이다. 청암(清庵) 석율(碩律) 선생의 증손이요, 정곡(井谷) 의권(儀權) 선생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태황제 즉위 3년인 병인년(1866년) 10월 2일에 정곡리(井谷里)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실 때 복숭아 꿈을 꾸어 길조를 알렸고, 용모가 비범하여 부모와 향인(와 마을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모두 알았다.
자라면서 과연 독서를 좋아하여 경서(經史)와 제자백가(子集)를 두루 널리 열람하였다. 성품이 관대하고 굳세어 큰 절개가 있었으며, 또한 담론(談論)을 좋아하여 고금의 일에 대해 마땅하고 그렇지 않음을 논할 때는 그 막힘없기가 마치 강물이 터져 동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하였다.
한번은 과거 시험(공거, 公車)에 나아갔으나 대책(對策)을 짓지 않고 물러나셨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公)이 대답하기를,
"지금 조정의 정치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고, 벼슬길은 마치 시장판의 장사치와 같으니, 비록 고귀한 상나라의 보배(훌륭한 계책)가 있은들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오로지 하였다. 아우인 태집(泰楫)과 더불어 날마다 부자의 인(仁)과 군신의 의(義), 부부의 분별 등을 갈고닦으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로는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여 부모를 봉양함에 맛있는 음식을 드시게 하였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지극하여 조문객들이 크게 감동하였다. 비록 상례(喪禮)의 절차가 까다로우나, 홀로 3년상을 치르며 부모님이 평소 즐기시던 음식을 보면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였다. 삭망(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묘소를 살피고 봉분을 다듬었으며, 비나 눈이 와도 거르지 않았다. 제삿날에는 비록 채소와 과일 같은 작은 제물이라도 반드시 몸소 점검하여 정결하게 힘썼으며, 제사를 마치고 예법에 어긋남이 없으면 기뻐하여 사람들이 그 지극한 정성에 탄복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독실하여 있고 없음을 서로 함께하였다. 미루어 종족(宗族, 일가친척)에게까지 이르러 가난한 이를 보면 구제하기를 마치 내 일처럼 급히 여겼다. 일찍이 흉년을 당하여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헤아리고, 종족을 크게 모아 범문정공(范文正公)*의 의장(구휼 제도)에 관한 시(詩)와 가르침을 외우며 눈물을 흘리니, 종친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 범문정공은 중국 송나라의 명재상 범중엄을 말하며, 의장(義莊)을 설치하여 친족을 구휼한 것으로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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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조금 넉넉한 자들이 다투어 곡식을 내놓으니, 마침내 식구 수를 계산하여 나누어 주어 굶주리는 참상을 면하게 하였고, 남은 것은 저축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취하고 줌에 방도(方道)가 있고, 쓰고 아낌에 절도가 있어 수년 사이에 마침내 큰 부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논밭을 사고 창고를 세워,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장례를 돕고, 때를 넘겨 결혼하지 못한 자의 혼수를 도우며, 부모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를 도왔다. 뜻은 있으나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학비를 대어주고, 재주는 있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한 자에게는 과거 시험을 보도록 도왔다.
그 종족이 삭(朔) 땅에 거주하는 자가 천여 호나 되었는데, 이미 모두 친밀해졌고 점차 사방의 종족에게까지 미치니, 이름을 '명친계(明親契)'라 하였다. 이는 가히 사대부 집안의 모범이라 할 만하였다. 또한 고을 사람들과 약조를 맺어 여씨향약의 남전(藍田) 풍속을 따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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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러 비적(匪徒)들이 크게 일어나 읍성을 함락하고 관장을 죽이며 "임금 곁의 악한 무리를 청산한다(청군측, 清君側)"고 성토하였다.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려 하자, 공(公)이 순리와 역리(順逆)의 이치를 밝게 타이르고 이해득실을 깨우쳐 주어 마침내 그만두게 하니, 이는 신의(信義)가 평소 사람들에게 두텁지 않았다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관찰사(도백) 이도재(李道宰) 공이 이 소문을 듣고 어질게 여겨, 손님을 맞는 예로써 만나기를 청하고 벼슬을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며 칭송하기를,
"사문의 도가 동쪽에서 열리니 우리 도의 지남(나침반)이라, 가르침 또한 방법이 많아 정녕 재삼 간곡하도다."
라고 하였다. 당시 안으로 의관(衣冠)을 갖춘 도둑들이 있고 밖으로는 창과 칼을 든 도적 떼가 있고, 나라의 정사(政事)는 해이해져 도로와 교량이 더욱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공(公)이 개탄하며 말하기를,
"도로와 교량을 닦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하(夏)나라 영(令)에 '구월이면 도로를 닦는다' 하였고, 제갈무후(제갈량)가 촉나라를 다스릴 때도 관청의 객사와 다리와 길을 수리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물며 우리 조선의 『경국대전』에도 또한 상세히 갖추어져 있거늘, 담당 관리들이 게을러서 거행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심히 한탄스럽도다."
하고는, 마침내 마을 사람들을 앞장서서 이끌어 곁에 있는 도로를 뚫고 다리를 놓았다. 이때 공이 솥과 가마를 팔아 필요한 물자를 가장 먼저 넉넉히 내놓으니, 사람들이 즐겁게 따라 공역이 성취되었다. 이로써 구영포(仇寧浦), 독탄(禿灘) 사이와 신풍천(新豊川) 등지의 곳곳을 사람들이 근심과 병통 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공으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했다면 그 시설(施說)하는 바가 어떠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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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국론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임금을 지켜야 한다는 수구파(主守舊者)가 있고 개화를 해야 한다는 개화파(主開化者)가 있었다. 이미 수구파는 패하고 개화파 중에 또다시 두 파가 갈리니 혹은 친러(親俄)하고 혹은 친일(親倭)하였다. 전날의 사색당파와 같더니, 마침내 친일파가 전승(全勝)을 거두었다.
일본이 이미 흉악한 무리의 조력을 얻어 안팎으로 똬리를 틀고 장차 조선을 병탄하여 집어삼키려 하였다. 저들은 고종의 영명함과 열강의 여론을 거리껴하여, 사냥개와 같은 자들을 부려 한 회(會)를 창설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위협하여 모두 가입하게 하니,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畯)이 그 우두머리였다. 이완용(李完用) 등 여러 역적과 서로 호응하여 이름하기를*'일진회(一進會)'라 하였다. 무릇 하는 짓이 있으면 반드시 이 무리를 앞세워 마치 백성의 원함에서 나온 것처럼 꾸미더니, 마침내 을사년의 보호조약(1905년)을 맺고 경술년의 합방(1910년)을 위조해 내니, 아! 슬프고도 뼈에 사무치는 일이다.
을사년의 흉악한 논의가 한창 퍼질 때, 공이 이를 듣고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다' 하였으니, 지금 나라를 팔아먹는 이 무리들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이에 이인수(李仁遂), 김시화(金時華), 이치성(李治星), 오봉근(吳鳳根), 이홍린(李鴻麟), 김기형(金基衡), 최우석(崔禹錫), 이학주(李鶴胄) 등 여러 뜻있는 동지들과 더불어 격문(檄文)을 돌려 그 죄를 성토하니 원근에서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이를 묶어 '자강회(自强會)'라 하고, 또 자제들을 이끌고 의병(義旅)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적들의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거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겨우 모면하였다.
국세(國勢)가 이미 이와 같이 위급한데 서양의 종교 무리(천주교/기독교)들이 또다시 널리 퍼져 고적(古蹟)을 파괴하고 국수(國粹, 나라의 전통)를 침 뱉고 욕하니, 공이 이를 배척함이 심히 힘겨웠다.
정미년(1907년)에 이르러 국채상환(國債償還)의 논의가 있어 부득이 관청에서 백성에게 돈을 거두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한 사람도 즐겨 내지 않고 도리어 횡포하다고 비방하였다. 조정이 서양 나라들과 더불어 시장을 열고 교역(통관시)을 하니 또 변고가 생길까 두려웠다. 아전들의 부역(수탈)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비방하는 말이) 전염되는 자가 많음을 듣고, 일을 핑계로 두루 청하여 모아 놓고는 깨우쳐 말하기를, "충효의 도리를 아는가?" 하고, 이어서 묻기를
"아버지에게 빚이 있다면 자식이 갚는 것이 옳은가, 아니한가?"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 "나라에 빚이 있다면 백성이 갚는 것이 옳은가, 아니한가?"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국채 상환에 응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자리에 웃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이치인즉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요순(堯舜)의 정치를 행하다가 불행히 9년의 홍수나 7년의 가뭄을 만나 백성을 살리려다 빚이 생겼다면, 백성 된 자로서 진흙과 숯불에 빠진다 해도 갚을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허나 저 세도(勢道) 부리는 집안들이 오로지 탐욕과 호사만 일삼다가 담장 안에서 재앙(환란)을 일으켜 놓고는 능히 감당하지 못하여 분분히 외세의 군대를 불러들였습니다. 나라를 그르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들의 부귀는 본래 예전과 같은데, 조정 위에서는 어찌 털끝만 한 도움도 내놓지 않고 도리어 번거롭게 잔약하고 지친 백성들만 괴롭힌단 말입니까?"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참으로 맞네. 그러나 이는 마치 '전갈(해충)이 미워서 감히 초가집 타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惜蝎而不敢救草堂)'과 같은 것일세. 국채를 갚지 못하면 반드시 땅을 베어주게 될 것이요(할지, 割地), 땅을 베어주다가 끝내지 않으면 반드시 망국(亡國)에 이를 것이니, 하루아침에 이민족이 우리 종묘를 헐고 우리 사직을 덮어버린다면 우리 무리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謀其政)고 하였으니, 선생께서는 관직도 없으면서 일이 너무 많으신 것 아닙니까?" 하니, 공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말하기를,.유태국(이스라엘) 조상들이 나라를 잃게 된 정신적 폐단(神弊)이 얼마나 들어있는가?"
라고 질타하니, 말하던 자가 부끄러워하며 탄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로 앞다투어 의연금을 내었다.
이 해(1907년, 정미년)에 마침내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변고(고종 강제 퇴위)가 있었으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부자(父子)가 서로 왕위를 전하는 것은 한국의 정해진 약속이니 국체(國體)에 손상이 없을 듯하나, 태황제(고종)께서 늙거나 정무에 지쳐서가 아니었다. 오직 저 흉악한 역적들이 나라를 팔아먹기에 급급하여 황제를 위협해 물러나게 하고, 거짓으로 의(義)를 빙자하여 새 황제(순종)를 세웠으니, 이른바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언다(履霜堅氷 - 재앙의 징조가 닥침)'는 격이라, 천하의 선비 중 누가 눈물을 삼키지 않겠는가.
비록 후황제(순종)께서 인효(仁孝)하시어 나라가 유지되기를 바랐으나, 기사년(1909년)에 이르러 흉악한 음모가 더욱 드러나고,*세 명의 우두머리가 저지른 화(三手之禍)가 조석에 닥쳐왔다.
공(公)이 또다시 '황제를 받들고 나라를 보호하자(부황보국, 扶皇保國)'는 논의를 주창하며, 일찍이 참여했던 이인수, 별장 이재겸, 전 주사 김시화, 그리고 선비 이치성, 안제익, 김기형, 김석규와 참사 오봉근 및 아우 태집 등과 더불어 글을 지어 감격스럽게 호소하여 나라 안의 의기(義氣)를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해외의 공법(만국공법)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마침내 경술년(1910년) 7월의 치욕(한일병탄)* 당하니, 오호라! 통탄스럽도다.
공이 마침내 백두산에 들어가 단군께서 강림하신 곳을 방문하고, 이에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취하여 읽었다. (대종교에 귀의하여) 수년 동안 그 잘못된 와전(訛傳)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오년(1918년)에 이르러 해외로 망명한 의사(義士)들이 점차 북만주 등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하늘에 고하고 집을 떠나(출산, 出山), 비밀리에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이끄는 곳을 방문하여 명성(물정)을 듣고 계책을 갖추었다. 또한 이범윤(李範允), 홍범도(洪範圖), 양기탁(楊起鐸), 이덕수, 전덕원, 이진룡, 이용담 등 여러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태황제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또한 글을 지어 널리 만주 땅을 다니며 옛 동지로서 아직 살아있는 자들과 이곳으로 옮겨와 사는 동포들에게 고하였다. 한편으로는 대종교(大倧敎) 원로인 백포 서일(徐一)과 무원 김헌에게 글을 보내 동시에 의거를 일으키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태황제(고종)께서 승하하시니, 이듬해 기미년(1919년)에 대한문(大漢門) 밖으로 달려가 곡(哭)하기를 마치 부모를 잃은 듯이 하고, 돌아와 다시 융희제(순종)의 복위를 꾀하니, 오직 나라가 있음만 알았지 내 몸이 있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공(公)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하루는 공이 향촌의 벗인 조봉점과 마주 앉아 글을 쓰며 옛일을 이야기하는데, 왜놈 가와카미 슌히코(川上俊彦)라는 자가 이르렀다. 대개 공이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염탐하러 온 것이었다. 그가 짐짓 묻기를, "한일합방에 대해 두 분 선생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학의 목이 비록 길다 하나 그것을 자르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 하나 그것을 이으면 슬픔이 된다고 하였소." (주: 『장자』에 나오는 말로, 인위적인 합방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뜻)
가와카미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에 배를 여러 척 사서 압록강 상류와 하류에 띄우고, 거짓으로 상호(商號)를 '통균사(統均社)'라 칭하여 아우 태집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낮에는 화물을 실어 나르고 밤에는 의병을 건너게 하여 외국의 관청(임시정부/독립군 기지)을 도왔다.
임술년(1922년) 9월 12일에 일이 발각되어 아우와 조카가 곤욕을 치르고, 이로 인하여 배를 모두 빼앗기고 조상의 유업이 남김없이 파산되었다. 부득이 동서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백성의 생업을 다스리고 왕도(王道)를 일으키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학문'에 두었다. 선현인 반계(유형원), 서계(박세당), 성호(이익), 풍석(서유구), 다산(정약용) 제 공(公)의 남긴 글을 취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즉시 가까운 곳에서 시험해 보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옛 산업을 다 다시 일으키니 장한 마음(壯心)이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는데, 또다시 흩어진 재물을 모아 의(義)로운 일을 사모하였다.
병인년(1926년)에 이르러 융희제(순종)께서 승하하시고 영왕(英王, 영친왕)이 또한 왜인에게 볼모로 잡혀 있어 동주(東周)의 맥을 이을 길이 없게 되었다. "하늘이여, 사람이여!" 공이 이해에 이미 쇠약하고 늙어 차마 궁궐이 황량해짐을 볼 수 없어 산소(장례)에 달려가지 못하였다. 이에 선비 김시화, 이인수, 김기형과 더불어 상의하여 성(城) 동쪽에 제단을 마련하고 바라보며 곡(哭)을 하니, 당일 참여하여 곡한 자가 2,500여 명이라 하였다.
이후에 호를 송은(松隱)이라 하고, 마침내 선성(先聖)을 사모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뜻을 오로지 하였다. 사림(士林)에 의논하여 압록강에 교회를 설립하고 복일학교(復日學校)를 세웠으며, 가재(家財)를 털어 새로 신풍학원(新豐學院)을 세웠다. 학교(校)는 어린이를 가르쳐 공경하는 법을 먼저 알게 하는 곳이요, 학원(院)은 성인을 가르쳐 마침내 통달한 인재가 되게 하는 곳이라. 제도가 이미 웅장하고 규모가 또 상세하여, 널리 경학(經學)에 통하고 시무(時務)에 밝은 이를 초빙하여 과목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고, 때때로 다시 몸소 독려하되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 몸(군사부일체, 君師父一體)'이라는 것과 충(忠)·효(孝)·열(烈)의 삼강(三綱)에 대해 간곡히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날로 번성하여, 백형규(白亨奎), 김활석(金活石), 박용구(朴鏞球), 서청산(徐靑山), 이관실(李寬實), 최석준(崔錫俊), 최시흥(崔時興), 백남규(白南奎), 김태연(金泰淵), 송상옥(宋尙玉), 김병주(金炳周), 양승우(楊承宇), 전봉천(全鳳天), 이장청(李長靑) 및 조카 유섭(裕涉) 등이 나란히 그 문하에서 배출되어 애국지사가 되었다.
바야흐로 왜인(일본)들이 군대를 보내 중국을 침략할 때(중일전쟁), 사람들이 모두 중국도 장차 왜놈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 하였으나, 공(公)이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르기를,
"적이 나에게 가해오기에 부득이하여 일어나는 군대는 응병(應兵, 응하는 군대)이라 하고, 남의 토지와 재물을 이롭게 여겨 침략하는 군대를 탐병(貪兵, 탐욕스러운 군대)이라 한다. 탐병인 자는 패하고 응병인 자는 승리하는 법이다. 이로써 보건대 중국의 군대는 응병이요, 왜인의 군대는 탐병이라. 어찌 탐병이 응병을 이길 수 있겠는가? 또한 미국과 영국의 이권이 중국에 많이 있으니, 왜인이 만약 승기를 타고 기세를 부리면 미국과 영국이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하의 군사가 이로부터 움직일 것이요, 움직이면 왜인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우리나라의 회복(광복)이 머지않았다."
그러나 (공은 또한 걱정하여) 말하기를, "북쪽에는 소련(蘇俄)이 있어 두렵고, 미국 또한 믿기 어렵다(難恃)" 하더니, 을유년(1945년)에 이르러 모두 징험(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의 의사(義士)들이 혹은 미국에 있고, 혹은 소련에 있고, 혹은 중국에 있으면서 본국의 광복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광복이) 되자 미군과 영국군은 우리나라의 남부에 진주하고, 소련군은 우리나라의 북부에 진주하여 각기 자신들이 친한 세력을 수립하고자 하니, 강토가 마침내 반으로 나뉘게 되었다. 공이 이에 『남북통일삼책(南北統一三策)』을 지었다.
정해년(1947년) 7월에 이르러 병이 들자 아들과 조카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팔십이 넘었다. 또한 국가가 광복되는 조짐을 보았으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우리 태황제(고종)의 혈육으로 오직 영왕(英王, 영친왕)이 계시는데 비록 왜국(일본)에 있으나 가히 맞아들여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남쪽 나라(남한)에 또 옛 궁전이 있고 윤황후(순정효황후)가 계시니,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모름지기 남한으로 가서 지식 있는 선비들과 많이 사귀어 영왕(英王)을 옹립하도록 도모하라. 이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이 뜻으로써 망한 나라를 잇고 끊어진 세대를 잇도록 하라."
하고는, 인하여 시를 읊어 '춘왕정월만년명(春王正月萬年明 - 봄의 왕 정월은 만년을 밝히리라)' 등의 구절을 읊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서거하시니, 이날이 14일이었다.
공은 평생에 스승으로 퇴계(이황) 부자와 미수(허목), 대산(이상정) 두 선생을 존숭하여, 도(道)를 짓고 설(說)을 세워 곧바로 세 선생으로 하여금 선대 군자들의 실마리를 잇게 하였으니, 어찌 소견이 있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행적을 상고해 보면, 세 선생은 임금의 은총(성권, 聖眷)이 융성하고 무거웠으되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웠으나, 공(公)은 지위도 없으면서 스스로 세상의 책무를 떠맡아 마치 불 타는 것을 구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어찌 서로 짝하지 않겠는가. 대개 처해진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맹자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게 한다면 또한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러했을 것(易地則皆然)'이라 말할 것이다. 그가 논저(論著)한 바가 많아 전임들이 밝히지 못한 바를 드러냈으나 아직 세상에 전하지 못하니 가석하도다.
아! 삭주(朔州)라는 고을은 옛날 흉노와 여진의 경계에 있어 가히 오랑캐의 땅(이복지지, 夷服之地)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고구려 때에 을파소(乙巴素)란 자가 있어 명재상이 되었고, 고려 때는 최문헌(최충)의 기풍이 있었다. 우리 조선 시대에 이르러 충재(沖齋) 권벌 선생이 정한 거처와, 포산(浦山) 공의 솔직함이 있어 효도와 우애, 부유함과 학문이 김공 익호(金公 翼虎)가 한번 풍도를 듣고 일어났고, 시습재(時習齋) 공이 능히 가학(家學)을 전하여 동향인 김창서(金昌書)와 함께 서원을 세우니, 마땅히 그 충의와 문학을 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될 것이다.
그 아들 유립은 본래 북부에 살면서 주남(主南, 남한 위주)의 평화통일, 자립경제, 자주교육의 계책을 주장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를 수년이나 하였다. 그 후에 다시 (탈북하여) 요동을 건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망명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公)의 유명(遺命)으로써 영왕(英王, 영친왕)을 옹립하고자 도모하였다. 그러나 '옛 왕도(王道)가 민주주의(民主)와는 반대된다' 하여 또한 체포되고 구금되어, 해를 넘겨서야 마침내 풀려났다. 이미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옥살이한 것으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되니, 그 충효의 성품은 유래가 있는 것이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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