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이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문의 제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자리한 육신사는 단순한 사당을 넘어, 멸문지화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충의 정신과 후손의 헌신이 결합된 역사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은 1456년 단종 복위 운동 실패 이후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그러나 비극 속에서도 가문의 맥은 기적적으로 이어졌다.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가 임신 사실을 숨긴 채 관비로 끌려가면서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씨는 친정인 성주에서 낳은 아들 박비를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과 바꾸어 데려와 ‘여자아이’라고 속였고, 이로써 박팽년의 손자인 박비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성장한 박비는 조선 성종 대에 이르러 사면을 받아 박팽년의 손자로 인정되었으며, 왕으로부터 ‘계창(繼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직계 후손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인물로 평가된다.
이후 후손들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골(묘리)에 세거지를 형성했고, 오늘날까지 순천 박씨 충정공파 집성촌을 이루며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 지역에는 사육신을 모신 숭정사를 포함한 육신사와 후손들이 거주하던 삼가헌 고택이 함께 남아 있어 역사적 전통을 보여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육신사가 세워진 배경과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성인이 된 박계창의 꿈에 할아버지 박팽년을 제외한 나머지 사육신 다섯 명이 나타나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고 떠돌고 있음을 호소했고, 이에 박계창이 박팽년과 함께 다섯 충신을 모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후 육신사에는 박팽년을 비롯해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특히 후손이 없는 충신들까지 직계 후손 가문이 책임지고 제향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육신사는 한국 유교 문화의 의리 정신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힌다. 현재까지도 후손과 지역 유림이 매년 제향을 올리며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향불이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전문가들은 “육신사는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을 후손이 책임지고 계승해 온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라며 “멸문지화 속에서도 직계 혈통이 이어지고, 그 후손이 다시 다른 충신들까지 함께 모신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전통”이라고 말한다.
왕권의 폭력 속에서 사라질 뻔했던 충절의 역사는 한 며느리의 용기와 후손의 의리로 이어졌고,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제향과 전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500년을 넘어 이어지는 육신사의 향불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역사를 향한 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관련 자료와 지역 사학계에 따르면, 현재의 육신사는 비교적 최근에 정비된 시설이다. 현재의 육신사는 1974년에 이전·정비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이곳에 사육신 위패를 모신 숭전사가 존재하였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육신사의 건물과 공간 구성은 1970년대 성역화 사업의 결과이며, 그 뿌리는 조선 후기 지역 유림이 세운 사당인 숭전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숭전사는 지역 선비들이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전해지며, 이후 추모 사업이 확대되면서 사당을 정비하고 규모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명칭이 육신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 전국적으로 진행된 충절 인물 재조명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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