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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3) 소위 ‘유사종교’라는 굴레

“ 종교인 듯 종교 아닌, 종교 같은 너 ”

 

식민권력은 민족종교에 소위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웠다.

총독부로 봐선 식민전략으로 꽤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통제에 매우 효율적이었고, 해방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거의 반세기 동안 민족종교 단속에 작동되었으니 말이다. 식민권력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통제의 메카니즘이 청산되지 못한 채 ‘자율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해방 후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유사종교란 뭔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민족종교의 활동들을 구속해왔을까?

포교규칙이 선포된 조선총독부 관보. 포교규칙으로 민족종교들은 사위 유사종교로 분류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종교’란 용어의 쓰임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1883년 전후부터 찾아볼 수 있는 용어였다. 그것도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religion’을 ‘종교(宗敎)’로 번역했던 데서 출발한다. 이를 우리가 다시 수입한 것이다. 그런 만큼 ‘종교’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서구 기독교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도 유·불·선이 있었고 동학이 있었다. 그것은 ‘종교’라는 용어로 재단될 수 없는 사상 혹은 믿음체계였다. 오히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주인 자리를 차지한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사종교’라는 용어는 1915년 「포교규칙」의 제정으로부터 나타난 개념이다. 1910년 강점된 이후 한국의 종교지형은 기독교와 불교, 신도(神道) 그리고 일본에서 들어온 각종 종교들과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보천교, 대종교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활동하였던 시공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강점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동화정책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식민권력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중심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교육과 종교가 있었다.
 
한국을 강점한 메이지 정부는 종교를 경시하지 않았다. 아니 경시할 수 없었다. 종교가 소위 국민을 통제·동원하는데 주요한 요소임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1889년 2월 「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면서 국가의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또 ‘신민(臣民)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종교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발표하였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았던 이전에 비해 한정적이기는 해도 신교(信敎)의 자유가 법률로 명문화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헌법 기초에 참여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무릇 종교란 국가의 기축을 이루어 사람의 마음깊이 침투하여 인심을 국가로 귀일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종교라는 것이 힘이 약하여 국가의 기축이 될 만한 것이 없다. 일본에서 국가의 기축이 될 만한 것은 오직 황실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결국 신앙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며, 국가의 기축은 모름지기 일본왕실이며 종교단체도 왕실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수행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일찌감치 일본왕실을 떠받드는 국가신도 체제를 확립하고 이에 초종교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이는 종교가 아니다(非宗敎)’ 라고 했다. 그리고 일왕이나 왕실을 비방하거나 그 존재를 부정 또는 의문시할 수 있는 종교적 교의(敎義)와 선포는 불경죄에 의해 처단되었고, 신궁(神宮)에 대한 불경도 엄격히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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