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연구의 지평에서 이른바 '대륙백제설'은 단순한 가설을 넘어 다수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된 역사적 실체로 존재한다.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제서(南齊書)』, 『남사(南史)』 등 중국 남조(南朝) 계열의 사서들은 공통적으로 백제가 진(晉)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요서 지역을 공략하여 그곳에 진평군과 진평현을 설치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확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반도사관에 익숙한 주류 사학계는 이를 고구려와의 전투 기록 오기(誤記)나 백제의 과장된 보고로 치부하며 그 실성을 부정해온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특히 <고구려국본기>는 대륙백제의 구체적인 통치 종식 시점과 그 이후의 변천 과정을 유일하게 전해주는 사료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태백일사」는 고구려 문자명왕(문자명제)의 독자적 연호인 '명치(明治)' 12년, 즉 서기 502년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고구려가 요서와 진평 등의 백제군(百濟郡)을 공격하여 폐지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대륙백제가 공식적인 행정 단위로서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며, 동시에 백제의 요서 영유가 일시적인 점령이 아닌 100년 이상 지속된 체계적인 통치였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태백일사 명치 12년(502년) 기록.
"명치 12년(502), 제군(諸軍)을 보내어 요서의 백제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병력을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폐지되었다(明治十二年...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 百濟郡 廢)". 이 기록은 대륙백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공식 행정권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조공 불이행'의 실체
고구려가 내세운 '불공(不貢, 조공을 하지 않음)'이라는 명분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역학 구도를 반영한다. 5세기 후반 백제는 488년과 490년에 걸쳐 북위(北魏)의 수십만 기병을 격퇴할 정도로 강력한 대륙 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기, 백제는 동성왕의 시해와 무령왕의 즉위라는 극심한 내부 진통을 겪고 있었다.
서기 502년은 백제 동성왕 사후 무령왕 즉위 초기로서 대외 방어력이 약화된 시기였으며, 중국에서는 남제가 멸망하고 양나라가 건국되는 대혼란기로 고구려가 무력 행사를 하기에 최적의 시기였다. 501년 동성왕이 가림성의 백가에게 시해당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직후인 502년, 백제의 중앙 정부는 대륙 영토인 요서와 진평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거나 고구려의 압력에 적절히 대응할 외교적 여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 요서 지역의 백제군을 무력으로 병합하고, 이를 고구려의 직할 군현으로 편입함으로써 백제의 대륙 내 직접 통치 거점을 소멸시킨 것이다.

무령왕은 즉위 직후 대륙의 공식 군현인 요서와 진평을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으나, 이를 다시 재편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무령왕 21년(521) 양나라에 보낸 표문에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更爲强國)"고 선언했다.

「태백일사」의 기록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는 부분이다. 이는 고구려가 요서 및 연안 지역을 장악한 후, 기존 백제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영토를 고착화하기 위해 자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신라 인구를 대거 이주시켰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민(徙民) 정책이다. 이는 대륙백제의 소멸 과정에서 발생한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와 고구려의 실효 지배 강화 매커니즘을 명확히 설명해준다.
태백일사 기록의 신빙성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명치 12년 기록은 주류 사학계가 무시해온 대륙백제사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제공한다. 중국 사서들이 백제의 요서 영유를 단편적으로만 기록하고 그 소멸 과정을 언급하지 않은 것과 달리, 「태백일사」는 고구려의 공격 시점과 명분, 그리고 그 결과인 군현 폐지 사실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대륙백제사에서 502년의 위치
「태백일사」의 명치 12년 기록은 대륙백제가 '언제까지 독자적인 군현으로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인 동시에, 한국 고대사가 한반도를 넘어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광대한 무대에서 펼쳐졌음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역사적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단편적인 사료 비판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 구도 속에서 우리 고대사를 재조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02년 백제군 폐지의 이면에는 고구려의 치밀한 물류 및 군사 전략이 숨어 있다. 고구려가 요서의 백제군을 폐지하고 그곳을 자국의 군현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영토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항이었던 천주와 월주를 잇는 해상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백제가 독점하던 남조와의 교역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이 컸다.
특히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긴 행위는 고구려가 한반도 내의 부속 국가인 신라의 인력을 활용해 대륙 점령지의 인구 공백을 메우고, 기존의 백제계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려는 고도의 통치 기술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한 정복 국가를 넘어, 대륙 내에서 다민족을 관리하는 제국적 면모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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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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