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이 방탄소년단(BTS)의 ‘아리랑’으로 진동한다. 그 거대한 울림이 담장을 넘어 세종문화회관의 ‘제4의 벽’ 안으로 스며든다. 누군가는 화려한 공연에 눈을 빼앗기고, 누군가는 투박한 유로폼 벽 사이를 서성이겠지만, 이 두 예술적 사건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나를 짓누르는 것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라는 실존적 투쟁이다.
![]() |
콘크리트 벽과 편견의 장벽: 파괴가 아닌 ‘직면’
박신양이 전시장 가득 세워 올린 유로폼은 우리 삶을 구획 짓고 억압하는 ‘콘크리트 같은 고정관념’의 실체다. 이는 BTS가 데뷔 시절부터 외쳐온 ‘편견과 억압’이라는 장벽과 궤를 같이한다.
박신양의 벽: 미술사적 권위, 사회적 통념,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거운 짐을 유로폼이라는 물성으로 시각화했다.
BTS의 철학: “Love Yourself”와 “Speak Yourself”를 통해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깨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한다.
두 아티스트 모두 벽을 단순히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벽 앞에 당당히 서서 그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박신양이 거친 유로폼에 붓질을 하며 벽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듯, BTS는 자신들을 향한 편견을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아 ‘아리랑’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정령의 움직임과 아리랑의 선율: ‘살아있음’의 증명
박신양은 예술의 근거를 ‘움직임’에서 찾는다. 그가 전시장 곳곳에 심어놓은 ‘정령’들은 정적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치다. 이는 BTS의 무대 퍼포먼스와 맞닿아 있다.
BTS의 ‘아리랑’은 박제된 전통 민요가 아니다. 수만 명의 아미(ARMY)와 함께 호흡하며 광장을 가득 채우는 역동적인 에너지, 즉 거대한 ‘움직임’ 그 자체다. 박신양이 작업실의 정령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외부로 끄집어낸다면, BTS는 아리랑의 선율을 통해 한국인의 혼과 전 세계 팬들의 감각을 동시에 깨운다. 박신양의 전시쑈가 공연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그 공간 자체가 이미 아리랑의 진동과 공명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짐과 투우사의 숙명: 예술가의 고독한 길
박신양의 그림 속 당나귀는 묵묵히 짐을 지고 걷는다. 투우사는 죽음을 마주하고 소 앞에 선다. 이는 BTS가 글로벌 스타로서 짊어진 왕관의 무게, 그리고 매 순간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예술가의 숙명과 닮아 있다.
김남준(RM)이 박신양의 전시쑈를 찾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RM은 예술이 주는 위안보다 예술이 탄생하기까지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작가의 시선’에 주목하는 인물이다. 1,500장의 유로폼을 나르며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이틀 만에 벽을 세우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박신양의 모습에서, RM은 전 세계를 무대로 투쟁하며 음악을 일궈온 자신의 궤적을 발견할 것이다.
제4의 벽을 넘어, 다시 ‘나’에게로
BTS의 공연이 끝나고 환호성이 잦아들어도 박신양의 ‘제4의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벽은 이전의 벽이 아니다. 아리랑의 뜨거운 기운을 머금고, 관객의 상상력으로 균열이 간 ‘소통의 통로’다.
박신양의 전시쑈와 BTS의 공연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벽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벽에 부딪히고, 만지고, 마침내 그 벽 너머의 ‘진짜 나’를 발견하라. 광화문 광장을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철학적 연대는, 우리에게 예술이 왜 여전히 유효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예술은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그 벽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거울이기 때문이다.
![]() |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