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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자본가 김기덕(金基德 1892~1953년), 이미지출처=이코노미스트 |
한국 근대사에는 총을 들고 싸운 독립투사들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총 대신 자본으로 싸웠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학교를 세우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나라의 미래를 지켜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김기덕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북아에서 손꼽히는 거부였으며 동시에 독립운동을 지원한 민족 자본가였다.
김해 김씨 출신의 자수성가형 거부
김기덕은 1892년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 김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통 양반가의 거대한 기반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통찰로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가였다.
젊은 시절 그는 무역과 상업 활동을 통해 경제 감각을 키웠고 특히 동북아 국제 정세와 무역 흐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되어 가던 시기였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경제 거점을 예측했다.
미래를 읽은 투자, ‘나진의 땅 부자’
김기덕을 거부로 만든 결정적인 선택은 북방 지역에 대한 대규모 토지 투자였다. 그는 함경북도 나진과 웅기 일대의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했다. 당시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는 변방의 땅처럼 보였지만 그는 이 지역이 장차 동북아 무역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측은 결국 현실이 된다
1930년대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나진항을 국제 무역항이자 군항으로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토지 가격은 폭등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나진 약 150만 평, 웅기 약 300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구 주변 섬까지 매입해 사실상 항구 주변 땅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잡지들은 그를 두고 “무한대의 금을 가진 사람”, “반도를 들썩이게 하는 거부”라고 표현했다.
부를 민족의 미래에 사용하다
그러나 김기덕의 삶을 단순히 ‘부자의 성공담’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부를 개인의 사치보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려 했다. 그는 독립운동 세력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교육 사업을 후원하며 민족 계몽 운동에도 참여했다. 학교 설립과 교육 후원 활동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식을 지키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즉 그는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의 기반을 지탱한 경제 후원자였던 셈이다.
자본으로 싸운 또 하나의 독립전쟁
독립운동은 무장투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기를 사기 위한 자금, 망명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 학교와 언론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덕 같은 민족 자본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역사책에서 크게 조명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의 숨은 혈맥 같은 존재였다.
부의 의미를 다시 묻는 삶
김기덕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성공한 개인은 역사와 사회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아니라 부를 통해 시대에 응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는 ‘갑부’이기 이전에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자산을 사용한 독립운동가였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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