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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의 아리랑, 왁스 실린더에 새겨진 망명의 노래

잡음 섞인 낡은 축음기 너머로 한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산 넘고 물을 건너 무얼 하려고 여기 왔나..." 130여 년 전,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울려 퍼진 이 가락은 우리가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민족의 영원한 노래, '아리랑'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1896년 7월 24일, 워싱턴 D.C.의 한 저택에서 이루어진 이 17분간의 녹음은 단순한 소리의 채록을 넘어 우리 근대사의 명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낯선 땅에서의 조우: 인류학자와 세 명의 청년
이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은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스 플래처(Alice Fletcher)와 조선에서 온 세 명의 청년—안정식(23세), 이희철(24세), 송영덕이다. 이들은 본래 고종 황제가 보낸 최초의 관비 유학생이었으나, 일본 유학 중 경로를 이탈해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자금이 바닥나고 언어 장벽에 부딪힌 이들에게 손을 내민 것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당시 주미 공사였던 서광범이었다.

서광범의 주선으로 흑인 교육의 산실인 하워드 대학교에 적을 두게 된 청년들은, 플래처의 에디슨 원통형 유성기 앞에서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부른 '강원도 아라리'는 오늘날의 세련된 아리랑과는 다른, 투박하면서도 절절한 원형의 사운드를 간직하고 있다. "무얼 하려고 여기 왔나"라는 가사에는 망명객과 유학생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던 청년들의 실존적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목소리의 주인공들: 엇갈린 삶의 궤적
하지만 이 아름다운 기록의 이면에는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녹음의 주역 중 한 명인 안정식의 후일담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미국에서 근대 문물을 익힌 엘리트였던 그는 귀국 후 일제 강점기 동안 고등통역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삶은, 1896년 워싱턴에서 "산 넘고 물을 건너" 애환을 노래하던 순수한 청년의 목소리와 대비를 이룬다.

 이희철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명문가 자제로서 평생 학문에 매진하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생을 마감했다. 똑같이 태평양을 건너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두 청년의 엇갈린 행보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사의 준엄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130년을 뛰어넘는 울림
잊혔던 이 기록이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1990년대 중반, 음악학자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의 발견과 정창관 부회장 등의 헌신적인 복원 작업 덕분이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왁스 실린더 속에 잠들어 있던 목소리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다시금 생명력을 얻었다. 최근에는 글로벌 아이콘인 BTS가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콘텐츠를 선보이며, 과거의 '고립된 노래'를 전 세계가 함께 즐기는 '공유된 문화'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1896년의 아리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가장 오래된 음성 기록이라는 사료적 가치에 머물지 않는다. 고국을 떠나 낯선 세계와 마주했던 청년들의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진 굴곡진 삶까지를 모두 품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다.

에디슨 실린더의 거친 잡음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를 발견한다. 누군가는 변절하고 누군가는 명멸해갔지만, 그들이 남긴 가락만큼은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 130년 전 청년들이 왁스 실린더에 불어넣은 숨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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