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 않고 살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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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 삶은 소통이다..... 한숨 아닌 ‘큰 숨’
한국 형 자본주의의 소외된 일자리 구조와 이로부터 파생하는 제 인간관계들에서 숨죽임과 억누름에 스트레스가 축적되다가, 이대로는 죽을 것만 같아, 모두 내려놓고 가까운 자연이나 둘레 길이라도 찾는 사람들이 느는 것은 무엇을 말해줄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조여드는 숨통을 트는 일이 이들에게 절실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큰 세상’에서 ‘큰 사람’들로서 눌림이나 막힘없이 자유로이 ‘큰 숨’ 쉬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큰 삶’에의 길은 숨 막힘, 숨죽임, 주눅, 근엄, 불안을 벗어나 스스로 그리고 함께 인정하는 ‘꼭 필요한’ 부담 외에는 부담 없이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만나고 소통하는 길로 이어진다.
부담(負擔)은 무거운 짐을 메거나(擔) 지는(負) 일 또는 그 짐이다. 쓸데없는 짐은 내려놓는 것이 좋다.
결국, 사람의 삶이 문제다. 사람의 삶은 늘 함께하는 삶이다. 자연과 함께하고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보다 ‘큰 삶’을 찾아가는 일은 무엇보다, 이런 ‘함께의 모습’이 어떠하냐의 문제라 할 것이다.
'큰 삶’은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세상크기로부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삶은 숨을 쉬는 일이다. 숨이 멈추는 ‘숨지다’는 죽음을 의미한다. 숨도 소통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자연이 자연히 숨 쉴 수 있게 배려할 때, 자연도 사람이 자연히 숨 쉴 수 있게 배려한다. 일종의 공존이랄까? 아니면, 상생(相生)?
사람들이 함께하는 삶에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할 수 있을 때, 사람이 자연히 ‘큰 숨’ 쉴 수 있는 삶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한숨’ 쉬는 일이 없는 혹은 숨죽이는 일이 없는 삶이 아닐까?
갑질의 시대는 한숨 쉬거나 숨죽이는 일이 너무 많은 시대다. 삶에 반하는 함께와 나눔의 모습이다. 갑질의 입장에서는 문제를 거의 못 느낄 것이다. ‘을질’의 처지에서는 그러나 많이 느낄 것이다. 비로소 ‘병질’(竝-)의 시각에서 절실히 느낄 것이다.
‘좋은 삶’의 타고난 잠재능력들을 맘껏, 몸껏 펼쳐갈 수 있는 사람이 ‘이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이상적인 사람과 같음’이 ‘사람-다움’일 것이다. ‘
~답다’라는 말은 ‘~같다’는 뜻이다. ‘사람크기’는 한 사람이 존엄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다른 인적 물적 존재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제 능력들, 조건들을 갖추며 사람다움에 다다른 정도의 크기를 말하고, ‘삶의 크기’는 한 사람이 존엄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다른 인적 물적 존재들과 함께 사람답게 사는 정도의 크기라고 우선 말할 수 있겠다.
사람답게 사는 정도의 크기인 삶의 크기와 사람다움의 정도 크기인 사람크기는 서로를 나타낸다. 같은 맥락에서 ‘세상크기’는 세상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내지 존재들과 함께 ‘큰 사람’으로서 ‘큰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정신적 제 조건들을 갖춘 정도의 크기라 할 수 있다. 이는 세상이 사람들을 ‘사람답게’ 혹은 사람 삶을 ‘사람 삶답게’ 만들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춘 정도의 크기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 1724~1804)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다움’(Menschheit)이나 ‘완전한 공화국’(eine vollkommene Republik), ‘행복한 삶’(ein glückseliges Leben) 등의 관념이 없으며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한 관념 없기 때문에 본능(Instinkt)과 권위(Autorität)에 따라 행동한다’.
결국, ‘사람다움’의 내용과 그것의 실현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떠하냐가 문제라 할 것이다. 이런 ‘큰 세상’, ‘큰 사람’ 내지 ‘큰 삶’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까워지려는 하나의 이상(理想) 상태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년경)의 ‘이데아’에서처럼... 현실에서 그 완성은 없기에, 가까워진 정도 내지 그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다만, 영원하다는 이데아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존재임에 비해, ‘이 세상’의 이런 사람다움은 스스로 그리고 함께 노력한 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이상이라 할 것이다.
세상크기, 사람크기, 소통크기 등에서의 ‘크기’는 좋음, 훌륭함, 바람직함, 이상적임의 정도를 말한다.
大, gross, great, magna, gran, grand, grande 등 외국어에서도 ‘크다’는 ‘뛰어나다’, ‘훌륭하다’의 의미를 함께 갖는다. ‘크다’, ‘훌륭하다’의 내용은 일정한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이나 학파, 시대나 문화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다름에 열음, 다름을 존중, 다름과의 소통이 필요함을 말하는 한 대목이다.
일반적인 이 공통분모 자체도 상대적이기에 그때그때 내용과 표현방식에서 바뀐다.
공자에게 큰 세상은 공자의 도(道) 혹은 인(仁)이 실현되는 세상을 말하고,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Deleuze, 1925~1995)에게 큰 세상은 ‘뿌리줄기’ 모양의 ‘노마디즘’적 질서로 이어진다. 중국의 철학자 묵자(墨子, 기원전 479~381년경)에게 큰 삶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겸애교리’(兼愛交利)의 삶이고, 기독교인들에게 큰 삶은 나, 인간, 이 세상을 넘어 주(主)를 영접하여 ‘주 속에 내가 있고 나 속에 주가 있는’ 영원한 삶을 말한다.
그런데 아스테카 인민들, 고대 로마의 안토니우스, 후백제의 여염집 아녀자, 공화정 로마의 노예, 안산의 외국인, 북한군의 하사관, 비단길 대상의 자녀, 2015년 1월의 시베리아철도의 한 운전자, 일자리가 없거나 ‘상당히 나쁜 일자리’뿐인 이 땅의 아빠엄마들 혹은 떠오르는 한 정치인을 돕는 A 학생에게 혹은 B 승(僧)에게 큰 세상, 큰 삶은 어떤 모습들일까? 아니, 그냥, 우리 독자님들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은 어떤 모습일까? 왜 그런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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