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 힐링 인물, 지명
희생된 소년왕을 넘어…영화가 다시 깨운 단종의 정치와 리더십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

1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조선의 비운의 군주 단종을 다시 현재로 불러냈다. 영화는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된 어린 왕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역사학자의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한다. 실제 역사 속 단종은 단지 연민의 대상에 머무는 인물이 아니라 정치의 원리와 인재 등용의 기준을 고민했던 군주였다는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세종과 정조 등 조선 전기 군주와 재상의 리더십을 연구해온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은 단종을 두고 “역사 속 희생자로만 치부하기엔 아까운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단종이 세종과 문종이 설계한 이상적 유교 정치 체제를 이어가려 했던 능동적 군주였으며 정치와 국가 운영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1452년 경연에서 단종은 신하들에게 “사무사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박팽년은 “생각에 사사로움이 없고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바르게 된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박 원장은 이 질문이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정치란 무엇이며 권력은 어떤 마음으로 행사돼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의식이었다고 해석했다. 어린 군주였지만 이미 정치의 근본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쇼박스

박 원장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해 사실과 상상이 결합된 역사극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세부 사건에는 허구가 많지만 조선 정치가 안고 있던 권력 갈등의 구조를 오늘의 관객에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실제 기록 속 단종 역시 결코 수동적인 군주가 아니었다. 단종이 즉위 후 처음 남긴 말은 “여러 대신과 의논하라”였다. 박 원장은 이를 세종 시대 협력 통치의 원리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읽는다. 단종은 지방 수령을 직접 만나 선정을 당부했고 경연에 꾸준히 참석했으며 수양대군에게도 함께 어려움을 풀자고 당부할 만큼 국정 운영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의 정치 감각은 인사 문제에서도 드러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약회 임명 논쟁이다. 언관들이 인사 발령 취소를 요구하자 단종은 선왕의 뜻을 근거로 반박하며 능력 중심의 인사 원칙을 분명히 했다. 감찰 이윤의 파면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추천보다 자질과 능력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박 원장은 단종이 17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고 장기 통치했다면 조선의 정치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왕보다 그를 둘러싼 권력 구조에 있었다. 박 원장은 재상들이 아들과 사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합격자 수를 늘리고 황보인은 아들을 1년에 다섯 단계나 승진시키는 등 인사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종서 역시 자격이 부족한 아들을 천거했다. 세종이 중시했던 인사 상피 원칙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원칙론자들조차 사사로운 인사 관행 앞에서 무력했다. 박 원장은 계유정난 이후에도 이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가족 중심의 특혜가 공신 중심의 권력 배분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진단했다.

금성대군의 복위 시도가 성공했다면 단종이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박 원장은 신중했다. 이상적으로는 단종이 복위하고 금성대군이 보필하는 구도가 가능했을 수 있지만 권력을 쥔 금성대군 역시 또 다른 수양대군이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왕과 강력한 숙부의 조합이 긴장을 낳는 구조는 역사에서 반복돼 왔다고 그는 짚었다.

수양대군과 세조에 대해서도 박 원장은 공과를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수양대군의 가장 큰 과오는 중요한 인재를 제거하고 시대정신을 왜곡한 데 있었다. 유교 정치의 이상은 군주가 다소 미약하더라도 훌륭한 재상이 보필하는 체제였지만 수양대군은 그 역할에 머물지 않고 왕위를 차지했다. 단종과 충신들이 기대했던 주공의 역할이 좌절된 것이다.

다만 세조의 통치 능력 자체는 인정해야 한다는 평가도 내놓았다. 세조는 여진 정벌 등 국방 문제 해결에 두각을 보였고 세종 때부터 이어진 경국대전 체제를 완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박 원장은 이를 두고 성과는 뛰어나지만 권력 행사 방식은 납득하기 어려운 리더십의 딜레마라고 해석했다.

그는 단종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단순한 왕위 교체 이상으로 본다. 단종의 퇴위는 세종과 유교 지식인들이 구축해온 이상적 왕정 시스템의 붕괴를 뜻했다는 것이다. 세종 시대에는 정책 토론과 학문 중심의 정치가 활발했지만 이후에는 정치적 생존과 줄서기가 우선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국정을 이끌 능력보다 누구 편에 서 있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정치 문화가 이때부터 깊게 뿌리내렸다는 진단이다.

박 원장은 단종이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면 조선의 정치 또한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라고 본다. 의정부서사제를 중심으로 한 군신 협업 체제가 유지되고 집현전과 경연 역시 지속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 시대 핵심 인재들도 북방 개척과 국방 행정 학문 분야에서 더 큰 역할을 했을 수 있으며 단종의 소통형 리더십 아래 인재들의 역량도 더욱 크게 꽃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은 곧 오늘의 리더십 문제와도 맞닿는다. 박 원장은 태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조선 전기 약 50년을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충실한 시기로 꼽는다. 정치 과학 국방 행정 문화가 함께 발전한 시기였고 특히 세종은 사람마다 하나씩 잘하는 바가 있다는 인유일능의 관점 아래 적소적재의 원칙을 실현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국방의 김종서 음악의 박연 과학의 장영실처럼 각 분야 인재가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태종이 칼과 창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면 세종은 문으로 백성을 살리고 국격을 높이는 수성 군주의 길을 걸었다고 박 원장은 설명했다. 그는 오늘의 정치 역시 계산이 아니라 인재를 제자리에 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 능의 이름인 영릉의 ‘영’이 꽃이 가장 만개한 때를 뜻하듯 세종 시대의 진정한 성과는 제도와 업적을 넘어 인재들의 꿈과 능력이 활짝 꽃핀 시대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다시 꺼내든 단종의 서사는 단순한 궁중 비극이 아니다. 정치는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권력은 어떤 마음으로 행사돼야 하는가. 국가는 어떤 인재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박현모 원장의 해석에 따르면 단종은 짧은 재위 기간에도 이미 이 질문들을 던지고 있던 군주였다. 3년 2개월의 통치는 짧았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울림은 지금도 작지 않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장은 2023년 6월 취임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세종과 정조 연구의 권위자로 꼽힌다. 여주대 교수와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정치가 정조』 『정조 사후 63년』 『정조 평전: 말안장 위의 군주』 『세종처럼』 등을 펴냈다. ‘경국대전의 정치학’ 등 80여 편의 연구 논문도 발표했다.

 

문윤홍 전문기자  moon4758@naver.com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윤홍 전문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