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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40주기] 스승 이유립을 회고하며 (전형배)

이 글은 이유립 평전 백년의 여정 (159쪽~ 163쪽)에 실린 글을 40주기를 맞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싣는다.
 

寒閣堂 回顧

전형배(全炯培)

• 7년전 민족정신의 化身을 처음 뵙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7년 전이 되는 神市開天 5876年 5月 중순경이었다. 세월은 흘러 선생님께선 이미 幽命을 달리한 고인이 되시었고, 못난 제자는 아직 멍한채 선생님을 생각하며 앞날을 개척해 나갈 방도를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7년여란 세월이 그리 긴 것만은 아니지만, 그간 선생님과 함께 겪었던 일들이 결코 내용 없는 서드레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 짧은 세월에 담기에는 過不容인 중대사重大事들이 많았다. 민족과 국가의 狀況이 多事多難했던 것처럼, 主體적인 民族史探究 分野에 있어서의 격동이란 실로 엄청난 바라 하겠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될 잔물결이 아니라, 고요 가운데에서 휘몰아오는 장대한 파도였으며, 어둠을 사르어 대지를 환히 하는 태양의 작열이었다. 선생님의 평생소원으로 빚어 놓으신 역사적 위업과, 그 속에 담겨 있는 문제제기는 정녕 태풍의 눈이었고 泰山의 脈이었으며 民族精神의 고갱이였음에 틀림없다. 하염없이 다가오는 아쉬운 마음이란 표현할 길이 없지만, 이제 영영 가신 선생님을 다시 떠올리며 몇 자 회고懷古의 글을 적어 선생님의 속 깊었던 정情을 전해두고자 한다.

• 내면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심
선생님께선 늘 고독과 싸우셔야 했다. 선생님의 신념은 세상의 질시와 가난을 적으로 하여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내가 선생님을 한동안이나마 옆에서 보살펴 드리기로 작정한 것도 기실 학문적 업적에 대한 찬탄보다는, 영양실조로 시달리며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세파에 온몸으로 맞서 나가시던 진실한 인간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생님은 칠순이 넘으시고도 내가 만난 뒤의 이태 동안도 홀로 생활하시며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운 겨울날에 연탄불조차 피우지 않은 그야말로 냉동방에서 지내셨다. 손은 곱아져 펴지질 않고 잉크는 얼어붙었으며, 휘몰아치는 광야의 성난 바람은 세상의 온갖 질시를 담아 방안을 기웃거렸고 차가움에 익숙지 않은 信念地帶(신념지대)의 異邦人(이방인)들은 고통이란 단어를 깨달아야만 했다. 

게다가 선생님은 眼力(안력)이 시원치 않은데다 시간과 경제를 두루 아낀다는 이유로 아침에 라면 서너개를 물을 넣어 한꺼번에 끓여서는 아침에 조금 들고 나머지는 솥채로 내어 두었다가, 점심 저녁때에 얼고 불은 그 라면을 다시 끓여 드시었다. 반찬이라 이름할 유일한 것이 간장 한 종지였던가? 그러면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드시던 라면을 치워 두고, 쌀이 있으면 쌀을, 라면이 있으면 라면을 다시 내어 손수 음식을 지으려 하셨다. 선생님은 공부하러 온 사람을 먹는 일 같은 것으로 신경쓰게 할 수는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선 언제든지 먹는 것, 입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자와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음은 물론 얘기조차 나누지 않겠다고 하시었다. 선생님께선 선생님의 운명, 곧 민족혼의 재생을 위해 스스로를 바쳐야 한다는 신조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온갖 욕망을 초극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와서 선생님의 생활의 비참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 人間(인간)이 다른 인간, 나아가 社會(사회)에 대한 어떤 책임을 지고자 결심할 때 그 결심에 따라 붙는 엄청난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결심은 하잘 것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한 시대를 긋는 선생님의 위업은 이미 내면적인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달성한 것이 된다. 나는 선생님을 뵈오며 모든 싸움은 내면과의 투쟁이며, 그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역사적 심판을 담당할 수 있고, 그 사람이 곧 역사가로서의 1등 자질을 갖춘 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나는 才學識(재학식)의 學問(학문)이전에 스스로의 삶을 주관적인 결단으로 이끌어가던 哲人(철인)이요 達觀者(달관자)에게 반해 있었던 것이다.

• 국사찾기는 자신감에서 비롯
선생님은 늘 당신도 아는 것이 없노라고 하시었다. 있는 것은 뜻 뿐이며 그 뜻 하나로 이제까지 버텨 오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면서 신진청년들은 모름지기 自信感(자신감)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더욱이 우리나라엔 불행히 역사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아직 역사를 확실히 안다고 말할 사람은 없으므로 모름지기 확신을 지닌 뜻있는 사람은 누구든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당신께선 先師(선사)들이 점찍어 놓았던 역사의 맥락을 조금 더 굵은 점으로 만들고, 때에 따라 드문드문 연결시켜 놓은 정도의 학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앞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모든 점들을 다 연결하여 민족정신의 대들보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後學諸位(후학제위)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고 틈있을 때마다 強調(강조)하시었다.

• 寒閣堂(한암당)이라 號(호)한 뜻
선생님의 堂號(당호)는 한암당이다. 차고 어둡다는 뜻을 내포한 이 호는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선생님께선 세상의 차고 어두운 측면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방황하는 民族魂(민족혼), 제한된 主權(주권), 縮小(축소)된 영토, 이반된 同族意識(동족의식)…. 그러나 가장 차고 어두운 것은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왜 본래 그대로의 자기모상을 팽개친 채, 진실을 외면하려 한단 말인가?

선생님은 차고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선생님의 밝고 따뜻한 마음은 차고 어두운 현실에 직면하여, 결국 철저한 비타협의 외길인생을 개척하도록 만들어졌다. 역사의식의 붕괴는 거대한 둑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으며, 그 구멍은 도구를 갖지 못하였을진댄 손으로, 발로, 그래도 안 되면 온 몸으로 막아야 한다. 도울 자 없는 싸움에 스스로 욕망과 타협하고 후퇴하는 것은 그대로 自滅(자멸) · 他滅(타멸)을 意味(의미)*다. 선생님은 타협도 후퇴도 하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는 선생님께서 행하신 그 힘겨운 싸움 덕분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게 되었고, 조금은 용이하게 그 붕괴사태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歷史(역사)는 變轉(변전)한다. 그 변전의 와중에서 고루한 명분론이나, 原則(원칙)없는 습-로 힘을 만들 수는 없다. 선생님께선 글자 하나를 두고 다투신 분이다. 글자 하나가 곧 世界意識(세계의식)의 集積(집적)임을 깨닫지 못하면, 진부한 歷史(역사)의 日常性(일상성)은 打破(타파)되지 않는다. 타파해야 할 명확한 대상을 두고 나아가는 길에 이미 酷寒(혹한)과 黑暗(흑암)이 문제 아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호를 한암당이라 하여 다가오는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더욱 맹렬히 대응할 수 있었다. 이미 춥고 어두운 데가 그의 집이거늘 그 어떤 고통이 선생님을 억압할 수 있었겠는가?

문득 정직하게 운명과 조우할 수 있는 고매한 인격을 지닌 분이 곁에 계시지 않음이 더욱 안타까워진다. 선생님의 춥고 어두움은 이제 幽宅(유택)으로 함께 갔을지 모르나 世上(세상)의 춥고 어두움은 아직껏 남아 있다.

• 후학에 대한 극진한 사랑
선생님께선 후학들을 지극히 아껴 주시었다. 때로 엉뚱한 질문을 하여 선생님께 혼줄이 날 경우도 있지만 평상시 조그만한 데까지 마음을 쓰시어 살펴주실 때는 절로 감읍하게 된다. 예컨대 누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 편히 앉으라 권한다. 그래도 그대로 앉아 있으면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그 자세로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언제든 바꿔야 되겠으면 지금 고쳐 앉으라 권하신다. 이쯤에 이르면 사람들은 선생님께 마음으로 고마워하며 자세를 고쳐 앉게 마련이다.

선생님께선 유달리 산을 잘 타셨다. 上溪洞(상계동) 壽樂山(수락산) 밑에 기거하실 때도 변함없이 산을 타셨는데, 선생님께선 이 산을 오르내릴 때 뜀박질을 하시었다. 건강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오르내리시어 주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차게 했다. 眼力(안력)이 나빠 그토록 고생하시면서도 산길만은 그야말로 거침없이 달리어 실로 위태롭다는 느낌까지 받을 지경이었다.

나도 가끔 선생님과 함께 오르는 적이 있는데, 내가 웬만큼 건강하다는 자부심도 있는 젊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에 오를 때 제일 반가운 말은 “전군, 힘드는가? 좀 쉬다 오를까?”라는 말이었다. 나는 멋쩍게 “선생님, 힘 안 드십니까?”하고 물으면, “태어나 계속 산속을 누비며 살아왔기 때문에 산에 들어오면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생기지”라고 하시곤 했다. 그리고 함께 산마루에 앉으면, 압록강을 통해 만주를 넘나들 때 추운 겨울 낙엽 속에 묻혀 밤을 지새워 생명을 건진 얘기며 첩첩산중의 대삼림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 다니다가 고생고생 끝에 소를 몰고 간 길을 찾아내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 등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시곤 했다.

어렸을 때 깊은 산길을 갈 땐 두려움에 떨다, 나중에는 “一神降冲(일신강충) 性通光明(성통광명)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이라는 念標文(염표문)을 외우셨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呪文(주문)이란 그 자체가 신통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집중력을 얻게 되어 때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산을 뛰어 올라갔다 와선, 좁은 부엌칸에서 나는 주머니를 털어 소주 한 두병과 간단한 먹을 것을 준비하여 선생님과 술자리를 펴곤 했다. 선생님께선 40이 넘어서야 술을 조금씩 드셨다 한다. 선생님의 선친께선 선생님이 술을 전혀 들지 않는다 해서 많은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40이후에도 가끔 한 두 잔씩 드신다 했는데 나는 선생님과 술자리를 만들 때마다 놀라게 되었다.

선생님께선 기분이 좋으면 술을 조금 더 든다고 하시면서 때에 따라 소주 두 홉들이 1병을 넘게 드시기도 했다. 이 경우 선생님의 주량을 모르고 주시는 술을 함께 받아 들던 술 약한 젊은 사람들은 놀라고 만다. 도저히 70대 중반을 넘긴 분의 건강과 주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선생님을 뵈올 때, 나는 주머니를 털고 선생님께선 마음을 터시고 언제나 꽉 차있던 소주병도 털어내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선 소주보다 약한 술도 그보다 강한 술도 좋아하시지 않았다. 가장 서민적인 풍모를 떨 수밖에 없었던 분의 자연스런 기호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처럼 그 작은 몸집에 어떻게 저토록 거대한 역사의 짐을 챙겨넣을 수 있었던가를 생각해 볼 때 선생님은 지극히 큰 理想(이상)을 꿈꾸시어 人間(인간)의 하잘 것 없는 욕망을 잊었으면서도 끝없이 인간의 소탈한 삶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반문한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방문 입구에 늘 붙여두는 參佺戒經(참전계경)의 한 구절처럼 세상을 사셨던 것이라 여기게 된다.

處衆而逸衆逸衆而厚衆(처중이일중 일중이후중)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리를 벗어나고 무리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무리를 두터이 한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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