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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소만 |
오늘은 동지로부터 시작되는 24절기 가운데 열한번 번째 절기인 소만이다.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드는 절기로 햇볕이 풍부해지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 그대로 자연은 생명력으로 충만해지고 들과 산은 초록빛으로 무르익기 시작한다.
예부터 소만은 초여름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여겨졌다. 고전 농서와 세시풍속에서도 중요한 절기로 기록되는데 『농가월령가』에는 “4월이라 맹하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맹하(孟夏)는 초여름을 뜻하며 이 무렵부터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소만이 지나면 들녘의 보리는 누렇게 익어가고 농촌은 모내기 준비로 분주해진다. 이른 모내기와 보리베기 그리고 밭작물 김매기가 이어지며 농가에서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가 시작된다. 예전에는 모판에서 모를 키우는 데 40~50일이 걸렸지만 현대의 비닐 모판 재배는 40일 이내에도 충분히 자랄 수 있어 소만 무렵이면 본격적인 모내기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풍요롭게 익어가는 보리밭과 달리 옛 농촌 사람들에게 소만은 가장 배고픈 시기이기도 했다.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바닥나고 새 보리는 아직 거두지 못한 때라 이른바 ‘보릿고개’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창고는 비어가지만 들판에는 보리가 익어가는 아이러니한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씀바귀와 냉이 같은 산나물로 허기를 달랬다.
씀바귀는 뿌리와 잎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봄나물로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또 이 시기에는 죽순을 따서 고추장 양념에 무쳐 먹거나 냉잇국을 끓여 먹는 풍습도 있었다. 보리와 밀은 점차 익어가며 여름철 주요 식량이 되어갔다.
소만 무렵 자연의 변화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대나무의 색 변화다. 산야의 모든 식물이 푸르름을 더하는 반면 대나무는 오히려 누렇게 변한다. 새롭게 돋아나는 죽순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운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마치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며 봄철 누렇게 변한 대나무를 ‘죽추(竹秋)’라고 불렀다.
또한 이 무렵에는 초여름임에도 차고 쌀쌀한 바람이 불곤 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전해진다. 이는 일교차가 크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건강을 조심하라는 삶의 지혜가 담긴 표현이다.
소만은 단순한 절기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삶이 맞물려 돌아가던 농경문화의 기억을 품고 있다. 들녘의 보리와 모내기 그리고 산나물과 죽순까지 모든 풍경 속에는 자연의 순환을 따라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생활 철학이 녹아 있다.
최유정 기자 susan1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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