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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왕과 색불루 단군, 잊혀진 부여의 역사와 단군조선 계승의 문제

우리 고대사에서 부여와 고조선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역사 서술에서는 부여가 고조선 멸망 이후 등장한 국가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부 사서와 독립운동가들의 저술, 그리고 『환단고기』 계열 기록에서는 부여의 역사를 훨씬 오래된 시대로 소급하여 설명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고등왕(高登王)이다.

▶ 이상룡이 언급한 고등왕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1년에 집필한 『서사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등왕 천도는 단군기원 1060년 갑자년에 있었던 일이요, 197년 뒤 신사년에 기자가 비로소 동래하였으니, 피하여 천도했다는 설은 절로 황당무계한 것으로 귀결된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여는 고등왕이 도읍한 곳이니 단씨(檀氏)의 신속이 된다는 것은 더욱 확실한 근거가 있다.”

이상룡은 여기서 고등왕을 부여의 왕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기자의 동래 때문에 천도했다는 기존 유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비록 연대에는 일부 착오가 있으나, 이상룡이 말한 ‘고등왕 천도’는 실질적으로 22세 색불루 단군의 백악산 아사달 천도와 관련된 전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환단고기』가 밝힌 제1왕조 종료 시점: 기원전 1,286년
사대주의자들이 설정한 기자 동래 시점: 기원전 1,122년
두 시점 사이의 차이: 1,286 - 1,122 = 164년
그래서 제왕운기는 164년의 공백기를 설정하게 된다.

이를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7년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손자인 색불루단군시절의 천도가 아니라 고등 시절의 천도로 보았기에 생기는 오류다.
 


▶고등왕은 누구인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등은 단군조선의 서쪽 제후국이었던 부여의 왕이다.

고등은 BCE 1289년 은나라 무정의 공격을 받아 은나라 땅이 된 귀방을 다시 탈환함으로써 힘을 얻어 당시 단군이었던 소태에게 우현왕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후 우현왕은 손자인 색불루(索弗婁)까지 계승되었고 이후 혁명 요즘말로 쿠데타를 통해 진한의 제22세 대단군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면서 새로운 통치 질서를 수립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후대 유학자들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변형하면서, 색불루 단군과 부여 계통의 역사 대신 ‘기자동래설’을 중심으로 서술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려 후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고조선 계통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색불루 단군과 부여계 대단군들의 기록이 배제되고, 기자조선이 정통 계승자로 부각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북사』에 등장하는 고등신

흥미로운 점은 고등이라는 이름이 『환단고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정사인 『북사(北史)』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북사』 「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묘(神廟)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婦人像)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고구려 사회에서 부여와 고등을 시조적 존재로 숭배하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 두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고등신에 대한 숭배 역시 부여 계통의 역사 전승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색불루 단군의 종묘 제사

『단군세기』는 색불루 단군이 즉위 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한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행차하여 종묘를 세우고 고등왕(高登王)에게 제사를 지내셨다.”

이 기록은 색불루 단군이 고등왕을 자신의 선조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부여와 진조선의 연결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대부여와 북부여의 계승

『단군세기』에 따르면 44세 구물단군은 장당경으로 천도한 뒤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개칭하였다.

후대 역주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4세 구물단군 때는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긴 뒤 국호를 개칭하여 대부여라 하였다. 대부여가 망한 뒤 옛 백악산에서 북부여가 건국되었다.”

이러한 서술에 따르면 역사적 계통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부여 → 대부여 → 북부여 →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 역시 주몽이 부여 계통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부여신과 고등신을 함께 모신 것은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채호가 주목한 색불루 단군의 혁명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색불루 단군 시대를 고조선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삼조선 체제가 단순한 행정구역 분할이 아니라 삼신(三神) 사상에 기초한 정치 질서였다고 보았다.

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신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삼한인 즉, 삼신설의 파탄이 생긴 이후에야 어찌 붕괴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채호의 해석에 따르면 색불루 단군 시기의 정치적 변화는 단순한 천도나 왕위 교체가 아니라, 고조선 통치 체제 전체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고등왕 논쟁이 갖는 의미

고등왕과 색불루 단군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 정설로 인정되는 주류 사학의 체계 안에서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이상룡, 역사학자 신채호 등의 저술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등왕, 부여, 색불루 단군, 대부여, 북부여로 이어지는 계통은 우리 고대사의 국통(國統) 문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고등왕을 단순한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부여 계통 역사 전승의 핵심 인물로 바라볼 것인지, 또는 후대에 형성된 신화적 존재로 볼 것인지는 앞으로의 사료 연구와 고고학적 검증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이상룡과 신채호가 공통적으로 기자동래설을 비판하면서 부여와 단군조선의 계승 관계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다시 검토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박종인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동역사를 연의처럼 썼다'고 한 것을 근거로 대동역사를 한낱 역사소설처럼 폄하하는데, 그렇지 않다. 

"『대동역사』 本史記 搜采의 材料 에서 “其 材料에 至하야는 正史뿐 아니라 或 可信할 境遇에는 口碑도 采하며 小說도 遵하노니, …… 壬辰錄이 雖誕이나 龍蛇慘狀의 一班이 此에 見하얏으며 朴氏傳이 雖謊이나 丙子亂離의 大略은 此에 想할지니 小說이라도 엊지 盡毁하리오”라고 하듯이, 정사뿐만 아니라 口碑 小說도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사료 이용방법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특히 소설을 사료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동역사의 특징 중 하나인 演義的 서술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大東歷史(古代史)』를 통해 본 신채호의 초기 역사학」) 

좀 한자가 있으니 번역을 하자면 아래와 같다 

『대동역사』의 「본사기(本史記)」에서 사료를 수집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료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정사(正史)뿐만 아니라, 믿을 만한 경우에는 구전(口碑,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채택하고, 소설도 참고한다. 비록 『임진록』은 허황된 내용이 많지만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상 일부를 그 안에서 볼 수 있으며, 『박씨전』은 허구가 많지만 병자호란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이라고 해서 모두 폐기할 수는 없다.”

신채호는 이처럼 정사뿐 아니라 구전 자료와 소설도 역사 연구에 참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면 출처가 정사가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소설을 역사 연구의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 점은 『대동역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연의체(演義體) 서술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동역사를 소설로 규정하는 것은 단재 신채호의 역사 인식과 저술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해석이다. 더욱이 단재의 역사 서술이 이상룡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것이 『환단고기』로 연결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서로 다른 맥락의 자료들을 무리하게 이어 붙인 해석에 가깝다.

어떤 사료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어떻게든 신채호와 이상룡의 역사적 위상과 학문적 성과를 깎아내리기 위해 억지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역사는 선입견이 아니라 사료와 논리에 근거해 평가해야 하며, 인물에 대한 평가 또한 당대의 문제의식과 학문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 자료 : 부여는 어디에서 왔을까? 고등왕의 비밀 : 네이버 블로그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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