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현재 GDP 기준 세계 경제 10위권, 방산 세계 5위의 강력한 국가적 위상을 떨치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를 휩쓰는 K-컬처(한류) 열풍까지 더해져 대외적 위상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과 문화적 확산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정작 우리 문화의 깊은 내면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뿌리 역사철학'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는 너무나 결핍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문화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운초계연수선생 민족역사와 독립정신 선양회(회장 서종환)가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선양회는 7월 14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운현궁 SK허브빌딩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심층 학습하는 ‘환단고기 공부모임’ 첫 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번 모임은 깊이 있는 소통과 내실 있는 학습을 위해 사회 각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초청하여 소수정예제로 기획되었으며, 향후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류 역사문화의 깊은 근원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날 첫 번째 강연자로 나선 박찬화 대한사랑 사무총장은 '환단고기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단상에 올랐다. 이번 강연은 단순히 『환단고기』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는지, 책을 둘러싼 논쟁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책의 구성과 역사적 배경은 어떠한지를 입체적으로 풀어내며 참석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운초 계연수 선생 선양회'에서 주최하는 5회 연속 강의 중 첫 번째 강의로 진행되었다. 아래는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환단고기』 논란과 학계의 위서론 비판
2025년 12월 12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대상으로 한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 "고대사 연구를 안 하는가"라는 발언이 나오면서 정치권, 언론, 학계에서 엄청난 논쟁과 포화가 일어났다. 야권 정치인들과 주류역사학계에서는 "반지의 제왕과 같다", "위서로 결론 난 지 오래다", "동화 수준의 극우·나치즘·파시즘적 서적이다"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발언 이후 『환단고기』 판매량이 평소보다 급증했다. 책의 본질을 직접 읽고 스스로 판단하려는 대중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해보면 환단고기가 읽을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학술 논문 검색 사이트를 분석해 보면, 진서임을 증명하거나 진서론의 근거를 대는 논문이 약 90%에 달하며, 위서론을 주장하는 논문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유학의 대가인 이기동 교수, 여성 신학의 개척자인 고(故) 박순경 교수(마지막 논문까지 환단고기 인용),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고(故) 이이효재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이 책을 깊이 공부했다. 박순경 교수와 이효재 선생은 동지적 관계로,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났다. 법륜스님 역시 환단고기를 지속적으로 전파해 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방송인들(김제동 등)도 방송 및 강연에서 환단고기가 가르치는 국통맥을 언급하고 있다.
5종의 고유사서
『환단고기』는 총 5종의 고유 사서가 합본된 책으로, 그 본문 속에는 더 많은 고대 역사 기록이 녹아 있다.
삼성기 상은 신라의 고승 안함로가 저술했다. 유불선에 통달하고 수나라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 최고의 지성이다.
삼성기 하의 저자는 고려 말의 학자 원천석(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손들이 국사와 저촉된다는 이유로 그가 쓴 야사 6권을 소각할 만큼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삼성기 하의 내용은 상편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구조를 취한다.
단군세기는 고려 말 공민왕 대에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이 저술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복애거사 범장 선생이 저술했다.
태백일사는 조선 중기 이맥 선생이 저술한 책으로, 『환단고기』 전체 분량의 약 60%를 차지하는 핵심 통사서다.
세조~성종 대의 고유사서 수거령
1457년(세조 3년) 명나라의 정변(탈문의 변)으로 천순제가 복위하자, 조선 조정은 집권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 시기 단종이 유배 및 사망한 것은 물론, 명나라보다 앞선 고대사를 기록한 고유 사서들을 민간에서 몰수하는 '수서령'이 발령되었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표훈삼성밀기』, 그리고 『안함로·원동중 삼성기』 등이 수거 대상이었다. 초기에는 다른 책으로 교환해주며 자발적 헌납을 유도했으나, 백성들이 책을 숨기자 예종 1년에는 "책을 숨긴 자는 참수형(닉자처참)"에 처한다는 가혹한 법령으로 바뀌었다.
위서론자들은 조선 후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수양산성을 쌓은 인물로 '안함, 원로, 동중'이라는 세 명의 이름이 나온다는 점을 들어, 세조실록의 기록이 역사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보다 80년 앞선 국가 공식 기록인 세조실록에 분명히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라고 책 제목과 저자명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성(三聖)'은 100% '환인, 환웅, 단군'을 뜻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성을 쌓은 인부 3명을 세 성인(삼성)의 역사서 저자로 둔갑시킬 수는 없다.
18세기 실학자 황윤석의 일기(50권 분량)에도 『안함로 원동중 지서』라는 책 이름이 명확히 언급되어있고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왜곡한 식민학자 이마니시 류조차 자신의 논문 『단군고』에서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를 언급하며 도가 계열에서 저술된 책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규식 선생은 저서 『한국혼』에서 "아 슬프다, 단군사는 어디 있으며 신지비사는 어디 있고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는 어디 있는가? 이름만 남고 책을 볼 수 없구나"라며 우리 고대 역사를 복원할 열쇠인 이 사서들을 간절히 찾았다. 이 사서들은 훗날 모두 합본되어 『환단고기』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천보산(청평산) 역사 복원 결의
고려 말, 몽골의 침략과 사대주의의 만연으로 고대사가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의식 있는 학자들이 모였다. 경기도 양주 천보산의 태수암(혹은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에서 행촌 이암, 소전거사, 복애 범장, 이명 세 분이 만나 역사 광복을 결의했다.
특히 소전거사는 고려 왕궁의 비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고대 사서를 확보하여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정리를 부탁했다. 이에 따라 행촌 이암은 단군조선의 역사인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정리했다.
『단군세기』 에 대해서는 가림토 문자 즉 정음 38자를 언급했다. 행촌 이암의 손자인 이원(세종 대 우의정·좌의정 역임)이 세종대왕에게 조부의 저서인 『단군세기』를 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조에는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창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다. 이것이 바로 가림토 문자다. 훈민정음 28자는 이 가림토 38자에서 10자를 제외하고 만든 것으로, 세종대왕은 기존에 원형만 전해지던 옛 글자(자방고전)에 음양오행, 천지인 사상 등의 혼과 원리를 불어넣어 완전히 새롭게 '창제'하였다.
대마도의 아히루 문자 및 신대문자는 강단 사학계는 훈민정음을 베낀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세신궁 등에 보관된 8세기경의 '신대 문자'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훈민정음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신대 문자에는 훈민정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가림토 문자에만 존재하는 특수 글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는 훈민정음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가림토 문자가 일본으로 전파된 명백한 증거다.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찬수 과정과 비선 자격 고증
이맥 선생은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의 고손자이며, 세종 대 정승을 지낸 이원의 손자이다. 이원 가문은 태종·세종 대 왕실과 겹사돈을 맺은 최고위 명문가였다.
강단 사학계는 관직 명칭(장예원 판결사 등)을 빌미로 이맥이 궁중 비밀 서적에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러한 내밀한 황실 친인척 관계가 있었기에 비밀리에 수거된 고서들을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을 검증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이맥은 장녹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괴산으로 2년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가문에 비장되어 있던 고서들을 읽으며 역사 정리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1520년(중종 14년) 찬수관 겸직을 통해 내각 비밀 서고의 책들(대변설, 조대기, 표훈천사 등)을 모두 섭렵하여 감수·보완한 후 『태백일사』를 완성했다. 완성 후 가문의 비책으로 엄수하며 외부 유출을 막았다.
가문에 비장되어 오던 이맥의 『태백일사』는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남명학파의 거두인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하게 되었다.
평안도 태천의 진사 백관묵은 『삼성기 하』와 『단군세기』를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형식 선생은 『단군세기』와 『북부여기』가 합본된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은 『삼성기 상』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백관묵과 이형식으로부터 소장 도서들을 기증받아 합본 편찬의 기틀을 마련했다.
단학회(단단학회)의 창립:
1909년 나철, 오기호, 해학 이기 등이 모여 단군교(대종교)를 중창했으나, 개천(開天)의 시조를 단군이 아닌 환웅으로 보아야 한다는 역사관·신관의 차이로 인해 독립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9년 5월 5일, 강화도 마리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단학회를 창립했다.
7월, 국망의 위기 속에서 해학 이기 선생은 제자 개연수에게 "삼신일체의 도는 나라가 망해도 끊길 수 없다. 반드시 역사 책을 세상에 내라"는 유촉(유언)을 남기고 절식자진(음식을 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하셨다.
계연수 선생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2년간 편집을 마무리한 끝에, 1911년 독립운동가 송암 오동진 장군과 여천 홍범도 장군의 자금 지원을 받아 『환단고기』 초간본 30권을 간행하였다.
책 속에 직접적인 주석이 없더라도 사료를 함께 읽고 검증한 과정 자체가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 행위이며, 훗날 발견된 사본 속 '이기 주(註)' 기록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발견된 개연수 선생의 친필 서책 『광명장』(1917년 작)에도 "해학 선사의 유촉을 받아 고전을 모으고 편집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은 계연수라는 인물이 가공의 인물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1920년 전병훈이 북경에서 저술한 『정신철학통편』에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발견하고 탁본하여 윤효정을 통해 전해왔다는 사실과 그 전문이 실려 있어 실존이 입증되었다.
또한 1921년 단군교 기관지 『단탁』에 실린 계연수의 편지글, 이시영의 『감시만어』, 『영변군지』,계봉우의 저술 등 다양한 30~50년대 문헌에 그의 활동과 천부경 전수 기록이 계속 등장한다.
계연수 선생은 오동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의 후원으로 만주 관전현 홍성납자에 독립군 정예 양성 기관이자 역사 교육 기관인 배달의숙을 세우고 독립군과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당시 배달의숙에는 3,000여 권의 고서와 역사 자료가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1920년 8월 15일(음력), 일제의 가장 악독한 밀정이었던 감영극과 일제 순사들이 배달의숙을 급습했다. 일제는 소장 서적 3,000여 권을 모두 압수하여 불태웠고, 계연수 선생을 체포하여 참혹한 고문 끝에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14세였던 제자 이유립 선생이 스승의 이 참혹한 죽음과 역사 말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살아남아 『환단고기』의 맥을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박찬화 사무총장은 위와 같이 1부 강연을 마무리하고 잠시 쉬었다가 2부 20분 정도를 추가하여 강의를 마무리하였으며 "『환단고기』를 둘러싼 소모적인 찬반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직접 원문을 읽고 다양한 사료 및 최신 연구 성과와 비교·검토해보는 자세"라고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 고대사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문화적 자긍심의 뿌리를 찾기 위해, 편견 없는 열린 학문적 접근이 지속되어야 함을 역설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민족의 영웅 운초 계연수 선생의 순국 106주기를 기리며 문을 연 이번 '환단고기 공부모임'은 첫 강연부터 깊이 있는 통찰을 선사하며, 한류 시대에 걸맞은 진정한 역사 정체성 찾기의 신호탄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다.
이날 강연에 참여한 분들 중 일부가 마무리 과정에서 단체사진 촬영을 하였다 (GPT 이미지)
유수연 기자 miracle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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