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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4) 제주도 법정사의 항일운동과 보천교

제주도 최초의 대규모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지역에 위치했던 법정사(法井寺)에서 1918년 발생한 항일투쟁으로, 보천교와 관련된 항일운동 중 집중 조명된 사건일 것이다. 관련 학술대회도 열렸고 많은 연구 결과물도 나왔다. 3·1운동 직전에 발생함으로써 그 의의가 더욱 컸으며, 때문에 제주지역 항일운동사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운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천교’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주로 불교계 항일운동으로 다루어져 왔다. 어떤 내용이며, 왜 그렇게 되었을까?

먼저 식민권력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차월곡은 신도모집을 위해 각지를 전전하다가 1918년 국권회복(國權恢復)의 미명하에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 김연일(金蓮日) 등과 서로 모의하여, 9월 19일 우란분회(盂蘭盆會) 때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했다. 여기서 왜노(倭奴)는 조선을 병합하고 우리 동포를 학대하며 가혹하게 다루어, 실로 왜노는 조선민족의 구적(仇敵)에 가깝다. 이제 불무황제(佛務皇帝)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먼저 일본인 관리와 장사치를 살육하거나 몰아내야 한다고 설(說)하였다. 그리고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라 칭하고 대오를 정리한 후 부근 각 면·이장(面里長)에게 ‘일본관리를 제거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직접 장정을 거느려 참가하라. 만일 따르지 않으면 군율에 비추어 엄벌에 처한다’ 라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고 제주성내를 향해서 행동을 개시했다. 가는 도중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全燒)시키고 일본인들을 살상하였다. 그 때 여기에 참가했던 38명은 검거했지만 차월곡, 김연일 등의 간부는 수 만 엔을 갖고 소재를 감추어 지금 행방이 불명하다.

이 기록으로만 본다면, 분명히 차월곡과 관련된 항일기록임은 의심할 나위없다. 차월곡에서 시작하여 차월곡으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차월곡은 이미 1914년과 1915년에도 ‘조선독립, 황제등극’ 등의 명목으로 고발되어 구금된 적이 있었고 1917년에는 ‘국권회복을 표방’했기 때문에 ‘갑종 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 편입되었다.

그 해에 그는 은피(隱避)의 길을 택해 비밀포교에 나서면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수만 명의 교도를 획득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이 무렵 차월곡이 ‘조선을 독립시키고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여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때부터 식민권력은 정읍 대흥리 차월곡의 교단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고, 또 꼬투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에도 차월곡의 모든 행동은 식민권력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정사의 집단 항일운동은 일제강점(1910) 이후 제주도에서 발생한 최초이자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보천교도들, 더 정확히는 선도교나 태을교도들이 참가하여 국권회복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한 예로, 1916년 신도가 되어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이후 서당을 열어 계몽운동에 힘썼던 강상백(姜祥伯 1898~1941), 봉개리 출신으로 1917년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강석구(姜錫龜 1882~1968)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식민권력은 이들을 불경죄, 육·해군 형법, 보안법, 범인 은닉, 수렵 규칙 위반, 총포 화약 취체법 위반 등 온갖 범죄로 옭아매어 구속하였다. 그리고 체포를 벗어난 다수의 교도들은 전북 정읍의 보천교 본부로 이주해 버렸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이해(1918) 11월에는 제주도의 신도였던 이찬경(李燦京)이 밭에서 수확한 면(實綿)과 실면에서 씨앗을 제거한 후 얻은 솜(繰綿) 19포대를 배에 싣고 목포로 옮기면서 그 배안에 비밀스럽게 많은 돈을 은닉하여 들여왔다가 목포경찰서에 단속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원래 선도교 간부 박종하가 제주도의 교도로부터 모은 현금 12,500원을 목포발 열차로 정읍(본소 재무계)에 보내려 했고, 같은 해 음력 3월과 9월에도 2천 5백원을 본소 채규일에 교부하려는 사실이 발각된 것과 동일한 맥락의 사건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교금은 식민권력이 특히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독립운동 자금과 연계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식민권력은 보안법 위반 및 사기취재죄(詐欺取財罪)로 교인 19명을 체포하였고, 이 때도 차월곡은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신도의 이름(이찬경, 강대거, 문인택 등)과 현금 액수(7만원, 10만원 등)는 자료에 따라 상이하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 때 1916년 만들었던 24방주 조직이 노출되었고, 강증산의 부인이자 차경석의 이종누이였던 고판례도 목포검사국에 체포 구금되었다.

법정사 항쟁은 보천교의 항일운동이다

이러한 제주도 법정사 항일운동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생각해보고 싶다.
 
하나는 제주도에 증산을 신앙하는 신도들이 다수였던 이유가 뭘까라는 점이다. 유사 이래 한민족은 내·외의 우환을 종종 겪으면서 비참한 삶의 질곡상태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참사람(眞人)’을 대망(待望)하여 왔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메시아였다. 하늘에서 내려온다거나 땅에서 솟아났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를 질곡에서 구해줄 참사람이 남쪽 바다의 섬에서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곧 ‘진인은 바다의 섬에서 나온다(眞人海島出)’거나 ‘남쪽 바다에서 온다는 믿음(南海出逢之說)’(󰡔일성록󰡕) 등으로 남쪽 바다의 섬에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도 ‘바다 가운데의 섬(海中島)’과 ‘큰 배(大舶)’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참사람의 상징이 결부되어 있었다. 또 당시 문초를 당했던 김이백(金履白)도 ‘바닷속 섬에 진인이 있다(海中島有眞人)’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구체적 연원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나, 오래 전부터 민중들 사이에 전설로 혹은 도참으로 퍼져있었던 민중사상의 핵심이었음이 분명하다. 한 예로, 연담 김운규에서 시작되어 김치인(호 光華)의 오방불교로 전개된 남학당(南學黨)도 전라도를 거쳐 제주도로 집단 이주하여 활동한 일도 이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증산이 “내가 미륵이니라” 하고 신원을 밝히고, 증산사상에 들어있는 후천개벽과 연결된 남조선 신앙 등도 이러한 민중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주지역에서 보천교 성장에 도움을 준 요인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법정사 운동이 왜 불교계의 항일운동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아직은 보천교라는 교명 자체가 나타나지 않은 시기이다. 때문에 보천교 항일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월곡에서 시작해 차월곡으로 끝나는 보고서로 보아 넓게는 증산계열의 항일운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또한 김연일이 법정사 주지이고 운동에 불교도가 다수 활동했다는 사실도 보천교 운동으로 보는데 고민이 될 것이다. 이제 와서 불교니 선도교(보천교)니 나눌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당시 이렇게 뚜렷이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증산 역시 대원사 칠성각에서 득도했고, 증산 사후에도 금산사를 중심으로 제자들의 종교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보천교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 시선이고, 아전인수격 해석이 될 뿐이다. 그러한 사례들은 많지만, 한 가지만 더 예를 든다면, 증산의 제자였던 김형렬의 항일운동 기록을 참조해도 좋을 듯하다. 김형렬이 위봉사의 주지 곽법경과 더불어 항일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8년 8월 16일, 김형렬은 곽법경을 찾아가 ‘태을교는 미신교로서 관헌의 단속이 엄중하여 공공연하게 포교하는 일이 가능하지 못하나, 곽법경은 다행히 현재 절 신도의 권유에 힘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도를 표면적으로 절의 신도로 취급을 받도록 한다면, 위봉사의 경비는 물론 승려의 수당 등도 부담을 할 것’이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곽법경도 승낙했다. 이로써 태을교도는 표면적으로 위봉사의 신도가 되어 공공연하게 위봉사와 그 말사(末寺)인 금산사 그리고 위봉사 전주포교당에서 회합하여 태을교 포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김형렬은 위봉사 전주포교당에서 스스로 절의 신도 총 대표가 되어 경기, 충청남북, 전라남북, 경상남북, 황해, 평북 및 강원도 각 도에 절의 신도 총대(總代) 백 명을 두고 태을교의 입교를 권유하면서 3·1운동 전후의 민심을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언급하였다.

당시 위봉사에 비치된 태을교에 속한 절의 신도 명부에 의하면 약 4천 5백 명이 등재되어 있고, 미등재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곽법경은 금산사 승려 김익현(金益鉉)에게 ‘태을교도로서 불교에 귀의한 자 현재 7천여 명에 달하고 이후 더욱 증가할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장래 조선의 일을 이야기하고 또 이를 단행함에 모두가 단체의 세력에 기대하면 그 목적이 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김형렬과 모의하여 이러한 의미에서 태을교도를 위봉사 절의 신도로 만들고, 암암리에 단체의 세력을 키운다면 장래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위봉사 주지 곽법경도 태을교도로서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당시 구속된 자들도 모두 위봉사의 신도들로 기록되었다. 그러면 김형렬의 항일운동도 불교계 운동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때 동학혁명도 ‘동학’을 붙이느니 마느니 논란이 있다가 이제 ‘동학농민혁명’으로 공식화되었다. 어쩌면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승려이기 이전에 곽금곡처럼 보천교도였을 수도 있고, 차월곡과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을 것이다.

오늘날 보천교가 힘이 있고 긍정적 이미지를 지녔다면 과연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심조차 든다. 자괴감이 든다. 다만 필자가 아직 풀지 못하는 한 가지는 차월곡의 행방이다. 서두와 말미에만 잠깐 나오고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이다. 제주에 가서 항일운동을 함께 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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