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자 수첩
발해는 왜 이정기를 도왔는가? 『환단고기』와 중국 정사의 교차 검증

8세기 후반 동아시아 중원 대륙에는 당(唐) 조정의 중앙 집권적 통제에서 벗어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 국가를 구축한 고구려 유민 세력이 존재하였다. 이 독립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패권을 행사한 인물이 바로 고구려 유민 출신의 명장 이정기(李正己, 732~781)이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서기 761년/765년부터 819년까지 4대 58년(혹은 55년) 동안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일대의 15개 주를 지배하며 '평로치청(平盧淄靑)' 번진을 기반으로 강력한 독립 왕국(국호: 제, 齊)을 운용하였다.

이정기 왕국은 통일신라보다 넓은 영토와 54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였으며, 강력한 자풍 군대와 해상 교역 독점권을 바탕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낙양을 위협할 정도의 패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국내 사서에서는 이정기에 대한 기록이 부재하였고, 현대 학술 연구와 대중적 역사 조명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졌다.

이정기 장군 및 평로치청왕국에 대한 중국 문헌 

중국 문헌에서 이정기의 생애와 평로치청 번진의 자립 과정은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의 24사 정사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사마광이 편찬한 통사 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정기 열전 및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어 그의 출생부터 사망, 그리고 후손들의 왕국 통치사가 상세히 정립되어 있다.

중국 정사에 따르면 이정기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며,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營州, 평로)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 당 대륙이 혼란에 빠지자 이정기는 고종사촌 형인 후희일(侯希逸)과 함께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평로군 2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산동성 청주(靑州)로 이동하여 군공을 세웠다.
765년 이정기는 당 조정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의 절대적인 추대를 받아 후희일을 축출하고 스스로 평로치청 절도사에 올랐으며, 당 조정은 그의 강력한 세력을 인정하여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정기는 치주(淄州), 청주(靑州)를 시작으로 주변 번진을 병합하며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에 걸친 15개 주를 차지하였다. 이 지역은 황하 하류와 대운하를 끼고 있는 곡창 지대이자 소금 생산지로, 당나라 전체 조세 운송의 핵심 요충지였다.

 『신당서』와 『구당서』는 당 조정이 제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수시로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렸으나, 이정기 일가가 당의 세금을 거두어 자체 충당하고 관직 임명, 형벌, 군사 운용을 독자적으로 행하며 국왕처럼 행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781년 이정기는 당 조정과의 전면전을 선언하고 대운하의 요충지인 용교와 서주를 차단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식량과 물자를 동결시켰다.

이정기 사후 그의 아들 이납(李納)은 국호를 '제(齊)'라 선포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로 이어지며 4대 58년(761~817) 또는 55년(765~819) 동안 독립 왕국을 유지하였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이정기의 대표적인 관직명은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御史大夫靑州刺史)'이다.

여기서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라는 직함은 이정기가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와 청주를 거점으로 당나라와 신라, 발해 사이의 해상 교통, 무역, 외교 사절 관할권을 전담했음을 명시한다. 이정기 일가는 등주항을 통제하여 동아시아 삼각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으며, 이는 평로치청왕국이 당나라 조정과의 장기 대립 속에서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KBS히스토리 채널은 2026년 6월 28일, 2007년 6월 30일 KBS에서 방송된 「55년간 중국 본토를 지배한 고구려인」을 다시 업로드하면서, 썸네일에 "우리 역사책엔 없는 인물"​이라는 문구를 사용해 이정기 장군이 마치 우리 역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는 사실과 다른 인상을 주는 표현으로, 매우 부적절하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정기 장군에 대한 국내 문헌 

 고려 및 조선 시대에 편찬된 전통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해동역사(海東譯史)』 등 관찬 역사서에는 이정기와 평로치청왕국에 관한 기록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한반도 본토 위주의 유교적 사관을 가진 사학자들이 중국 대륙 내부에서 자립한 고구려 유민의 번진 세력을 한민족의 정통 역사 범주에 직접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 문헌 중 이정기 장군의 대당 항쟁과 평로치청왕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문헌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 대진국본기(大津國本紀)」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원문: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逾將助"
해석: "대흥 45년(서기 781년)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임금(발해 문왕 대흠무)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 사료는 이정기가 산동 일대 15개 주를 다스리며 독립국 대제(大齊)를 세운 사실과 함께, 발해(대진국)의 3대 문왕(연호: 대흥)이 이정기의 대당 항쟁을 돕기 위해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발해 황제의 이정기 지원 기록에 대한 <환단고기> 입증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대흥 45년(781년) 발해 문황제(대흠무)가 장수를 보내 이정기의 대당 항쟁을 도왔다(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逾將助)"라는 구절은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다. 그러나 중국 관찬 사서의 명문 기록, 국제 정세 분석,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다큐멘터리 취재진이 발굴한 사료를 종합적으로 교차 검증하면 이 기록이 지닌 명확한 역사적 실체와 근거가 입증된다.

중국 정사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당 조정이 이정기에게 하사한 공식 직함으로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명확히 인용되어 있다.
이 직함은 이정기가 당나라 동쪽 해안의 관문인 산동반도 등주(登州)와 청주를 거점으로 발해 및 신라와의 외교 사절 수신, 해상 수송, 무역 관할권을 총괄했음을 뜻한다. 이는 평로치청왕국과 발해(대진국) 사이에 공식적이고 긴밀한 국가 차원의 통교 및 군사·경제적 협력 축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중국 문헌 자체가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이다.

KBS 역사스페셜 취재팀과 학계의 사료 검증에 따르면, 8세기 동아시아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 군수물자는 기병을 구성하는 '전쟁용 명마(戰馬)'였다. 당시 당나라에 맞서 10만 대군과 기병대를 육성하던 이정기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우수한 기동력을 갖춘 군마의 확보였다.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명마 생산국이었으며, 발해 3대 문왕(대흠무)은 이정기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의 발해 명마를 산동반도로 수출·공급하였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밝혀졌듯, 당나라 중앙 조정과 전면전을 펼치던 반란 번진 세력에게 전략물자인 전쟁용 말을 다량 공급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이정기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후원 및 전략적 지원을 의미한다. 발해 문왕은 전략 자원인 말을 공급함으로써 이정기를 당나라를 견제하는 든든한 서쪽 방패막이로 활용하였고, 이정기는 발해의 물적·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당의 대운하를 차단하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연호 및 시기의 완벽한 일치

『환단고기』에 기록된 '대흥(大興) 45년'은 발해 문왕 대흠무의 연호인 대흥을 기원으로 한 서기 781년에 해당한다. 781년은 중국 정사 사서에서도 이정기가 당 덕종의 번진 억압 정책에 맞서 주변 4진 절도사들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대당 전쟁을 일으킨 해이자, 이정기가 49세의 나이로 운주에서 요절한 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발해 유적에서 발굴된 정혜공주 묘비(1949년)와 정효공주 묘비(1980년)를 통해 문왕의 연호가 '대흥'이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와 같이, 『환단고기』의 대흥 45년(781년) 기록은 당대 동아시아 연호 체계와 실제 군사 거사 시점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문헌에 나타난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관직, 다큐멘터리 현지 취재로 확인된 발해 문왕의 전략 명마 공급과 해상 무역 연대, 그리고 연호의 정밀한 부합성은 『환단고기』에 수록된 발해의 이정기 지원 기사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정세와 역사적 실체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사료적 근거가 된다.

대중적 인식의 확산 시점 (1997년 ~ 2001년)

한국 사학계에서 이정기 장군을 역사적 연구 대상으로 최초 발굴하여 학술 논문으로 발표한 시점은 1975년이다. 극소수의 논문 이외에는 무관심하였던 이정기 장군의 역사가 일반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0년대 후반 교양서 출간과 2001년 대형 TV 다큐멘터리 방영에 의해서이다.

김병호 작가가 중국 사료를 고증하여 저술한 역사책 『고구려를 위하여』(하서출판사, 1997년)가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1997년 10월 2~3일, KBS 1TV는 개천절 특집 다큐멘터리 「중국대륙의 고구려왕국」을 방영하여 산동성 청주성의 성벽과 운주성의 곡식창고 터 등 이정기 왕국의 유적을 최초로 영상화하였다. 당시 현지 청주박물관 관계자들은 "이정기는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선조"라고 평가하였다.

2001년 5월 16일, KBS 1TV의 간판 프로그램인 『역사스페셜』에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 편이 전국에 방영되었다. 이 방송을 통해 이정기가 통일신라보다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당나라의 대운하를 차단하며 대륙을 흔들었던 명장이라는 사실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었다.

종합 평가 및 역사적 의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과 평로치청왕국의 역사는 당나라라는 거대 제국 한복판에서 고구려의 후손들이 4대 58년 동안 독자적인 독립 국가를 운영했던 장엄한 고구려 유민사이다.

중국의 정사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은 이정기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통치사를 명확히 증언하고 있으며2, 국내 문헌으로는 유일하게 『환단고기』가 그 역사적 사실과 발해의 군사·전략적 지원 기록을 담아 보존해 왔다. 국내 사학계에서는 1975년 김문경 교수의 최초 논문 발표로 학술적 연구의 물꼬를 텄으며, 2001년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국민적 교양으로 승화되었다.

특히 발해 황제가 이정기를 도왔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중국 정사의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관직 명문, 발해 문왕의 전략물자(명마) 공급을 다룬 방송 다큐 및 사료 고증, 그리고 대흥 45년(781년)이라는 정확한 연년 부합을 통해 그 역사적 타당성이 입증된다. 이정기 왕국의 역사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중원 대륙으로 뻗어나간 한민족 역사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며, 향후 동북아 역사학계에서 더욱 깊이 있게 조명되어야 할 핵심 과제이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찬화 전문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