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땅, 접지리 "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가 멸망한 고려의 수도를 돌아본 소회를 나타낸 싯구절 일부이다. 딱 그런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 또 한군데 있다.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이다.
주지하다시피 접지리는 1920년대에 보천교 본부가 세워졌던 마을이다. 행정명이 접지리이고 대흥리(大興里), 대앙리(大央里)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100여년 전 당시 보천교 본소의 위용은 사라졌지만, 그 파편화된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어 촌로들이 길손들을 안내하면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다. 말 그대로 인걸은 간 데 없고 태평연월의 꿈들만 옛 영광의 흔적들에 스며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옛 영광을 기억하는 이조차 많지 않은 실정이다. 설령 기억한다 해도 비난과 조소와 무시의 시선들만이 간간이 느껴지는 곳이다.
필자도 2016년 보천교 관련 최초의 학술대회가 전주시청에서 열렸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비록 선입견을 가졌던 종교일망정, 만약 보천교가 서울이나 그 근교에 둥지를 틀었다면 이처럼 천대를 받았을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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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교 본소의 전경 |
어즈버 100년 전의 옛 영광의 역사를 살려보려는 몇몇 힘없는 외침들만이 메아리로 남아있는 곳이다. 꿈을 빼앗기고 스러져간 보천교도들의 한숨소리가 강산을 덮고 있다. 정읍에 터전을 두고 식민지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활동하다 스러져간 종교단체, 그러다보니 알려지지도 않고 거의 한 세기에 가깝도록 연구자들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종교단체이다.
보천교는 왜 이곳에 둥지를 틀었을까? 보천교가 전라북도 정읍 접지리에 근거를 둔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먼저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이 서린 땅이었다. 1910년대, 한국을 강점한 일본의 국내 경제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공업화 정책은 전시호황을 맞았으나, 유럽에서 전쟁이 종결되면서 경쟁력이 약한 일본경제는 곤두박질쳤다. 공장에 취업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촌 인구가 감소했고, 쌀 가격 등 물가는 폭등했다. 이러한 상황은 1918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에 쌀 소동을 일으켜 미곡 가격 급등과 정부 반대운동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쌀 수탈이 본격화됐다. 그렇지 않아도 강점하자마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막대한 땅을 강탈한 조선총독부가 수탈을 본격화함으로써 조선의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는 그 수탈의 중심지였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호남이 중심이 되고 군산항은 수탈한 쌀들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출구였다.
19세기 말 동학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한 아픔의 땅 한가운데 정읍이 있었다. 전주와 광주의 중간 지점, 호남 서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보천교는 그 아픔을 내팽게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접지리는 차월곡의 출생지이다. 서쪽으로는 비룡산, 동남쪽에 입암산과 내장산 연지봉, 그리고 서남쪽에 방장산과 서북쪽에 국사봉으로 둘러쌓인 곳이다. 마을에서 보면 마을 앞은 입암산(笠岩山)을 바라보고 뒤편에는 삼두산(三斗山)이 위치했고, 동북방향에는 전북평야, 마을 중앙에는 작은 시냇물이 흘렀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땅이다. 평평한 모래밭에 날아와 앉은 기러기 떼의 모습을 한 땅이다. 그러한 곳이 아픔의 땅으로 변하고 있었다. 결코 내버려둘 수 없는 곳이었다.
한편 접지리는 문천무만(文千武萬)의 땅이기도 했다. 곧 다수의 문무관을 배출할 형상을 지닌 곳이었다. 보천교 본소가 자리하기에 적합했다. 입암산의 ‘입(笠)’은 ‘관(冠)’이므로 이 땅에서 반드시 왕자가 나오리라 보았고, 주변의 삼군리(三軍里), 필봉(筆峰), 군령리(軍令里. 군사를 일으키는 땅), 대흥리(大興里), 국사봉(國師峰. 국사가 출생하는 땅), 제령리(帝令里. 제왕이 출세하여 명령을 내리는 곳)는 모두 이와 관련된 지명들이었다.
당시 풍설에도 ‘호군가(護軍街)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왕심리(旺尋里. 단곡리)에서 왕을 맞이하여, 대왕리(大王里. 대흥리)에 천도하고, 과거리(科擧里. 과교리科橋里)에서 과거를 보아 관리채용 시험을 치룬다’고 했다. 접지리는 한반도, 아니 세상의 중심터(=대앙리大央里)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읍 접지리의 본소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22년 말에만 해도 이곳은 12가구 정도의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주하던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런데 1922년 중앙본소가 설치된 이후로 호구(戶口)가 점차 증가했고, 특히 ‘1924년 갑자년에 교주 차경석의 천자(天子) 등극 운운의 설(迷說)이 유포될 때에는’ 각지에서 교도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마을에는 날마다 인구가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25년 말경이 되면, 마을 호수가 3년 전에 비해 33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400호를 넘어설 정도로 변했다. 그 작았던 마을이 교도가 거의 1,900명에 이르러 ‘보천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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