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위대한 대륙 상고사와 지워진 국통맥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성인 시민들의 학술 열기가 폭염의 날씨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운초계연수선생 민족역사와 독립정신 선양회(회장 서종환)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환단고기 공부모임’ 그 두 번째 강좌가 지난 7월 30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운현궁 SK허브빌딩 B동 311호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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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2강은 지난 1강 박찬화 총장의 강연에 이어, 우리 고대사에 깊은 식견을 가진 충북대 안병우 교수가 초빙되어 단상에 올랐다. 그는 ‘한사군은 정말로 있었을까’라는 주제를 통해, 대한민국 주류 강단 사학계가 철칙처럼 받들고 있는 ‘한사군 재한반도설’과 ‘낙랑군 평양설’의 사료적·고고학적 모순을 파헤치며 "한사군 자체가 허구이며 실재하지 않았다"는 파격적인 논증을 제시해 장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 "사기와 한서에서 말하는 한사군의 허구성"
한사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나라 무제 때의 사관이었던 사마천이 쓴 『사기』의 <조선열전>에 나온다.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두었다(遂定朝鮮爲四郡)’는 기록이 바로 그것인데 이 기사는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가 2년에 걸친 전쟁 끝에 마침내 위만조선을 멸하고 나서 그 자리에 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사기』 <흉노열전>에도 나온다. 다만 <흉노열전>에서는 ‘이때 한은 동쪽에 있는 예맥과 조선을 공략하여 군으로 삼았다(是時漢東拔穢貊朝鮮以爲郡)’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군도 아니고 그냥 ‘군’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정황상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모두 기록이 단순하기 그지 없다. 어디에도 사군의 이름이 없다. 그런데 한사군의 구체적인 이름은 후대에 나온 『한서』 <조선전>에 등장한다. 『한서』에서는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 사군을 두었다(遂定朝鮮眞番臨屯樂浪玄菟爲四郡)’고 했다. 사군의 이름을 제외하면 『사기』 <조선열전>과 똑같은 문장구조이다. 한사군에 관한 1차사료인 『사기』에서는 사군의 명칭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한서』에서 그것을 진번, 임둔, 낙랑, 현토라고 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사마천은 서기전 145~서기전 86년에 생존하였으므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했다고 하는 서기전 108년 당시의 현장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만조선 멸망의 결과로 설치했다고 하는 한사군의 이름을 적지는 못했다.
『사기』 <조선열전>이나 『한서』 <조선전>이나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어서 반고가 <조선열전>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쓴 것으로 평가되는데, 사마천도 거명하지 못했던 사군의 이름을 반고가 기록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한사군이 실제로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1차적인 이유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조선열전>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왕 위만은 원래 연나라(A)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B)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B)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燕(A)에 소속시켰다(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 眞番朝鮮 爲置吏 築障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위 기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네 번 나오는 연나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A는 한의 제후국인 연을 말하고, B는 주나라의 제후국, 즉 전국시대 연을 말한다. 이 기사의 핵심내용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일부를 차지하고 그곳에 성과 요새를 쌓고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였는데 중앙정부가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바뀔 때까지 여전히 연이라는 나라가 관리하였으며, 이때 조선과의 경계는 패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국시대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함은 서기전 300년 경에 있었다고 알려진 연나라 소왕 때 장수 진개의 침공사건을 말한다. 『위략』에는 이때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을 정했다고 나온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도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진번은 원래 조선의 영토였고, 그 위치는 패수의 서쪽 어디쯤이었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연나라 장수에게 2천여 리의 영토를 빼앗겼다는 조선은 위만조선이 될 수 없고, 그 이전의 조선, 즉 단군조선의 일부였던 번조선이었다. 위만에게 나라를 잃은 기준왕은 기자조선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자조선은 허구이고 사실은 번조선이다. 번조선의 기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하던 무렵에도 한나라와의 국경은 여전히 패수였다. 이후 위만조선이 번조선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본다면 한나라와 위만조선과의 국경도 역시 패수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사기』 <조선열전>에도 분명하게 나온다. 즉 패수를 경계로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위만조선이 된다. 그런데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은 진번 땅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일텐데 진번은 애초에 위만조선의 강역이 아니라 패수의 서쪽인 한의 강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사군이 진실일 수 없는 하나의 이유이다. 사마천은 ‘사군을 두었다’고만 했을 뿐 그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음에도 반고가 한사군의 구체적 이름을 『한서』 <조선전>에 기록한 것은 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측을 끼워넣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한서지리지』는 낙랑군과 현토군에 대해서는 인구수, 가구수, 속현의 이름, 지리적 특성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진번군과 임둔군에 대해서는 그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또한 『후한서』에 따르면 진번군과 임둔군은 서기전 82년에 혁파되고 낙랑군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불과 27년 정도 존속했다는 셈인데 그 경위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번군과 임둔군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개연성을 시사하는 바가 아닐 수 없다.
■ 환단고기 북부여기가 전하는 한사군의 허구성
그렇다면 한사군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안병우 교수는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당시의 동북아 국제정세와 『북부여기』의 기록을 대조하며 날카롭게 고증했다.
『북부여기』 기록에 의하면 서기전 108년 한무제 유철이 위만정권을 멸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북부여로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북부여는 서기전 239년 해모수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삼국유사에도 분명히 국가였다고 나온다. 한무제가 북부여를 침공한 이유는 위만조선을 멸했지만 그 동쪽에 있었던 거대 제국인 북부여를 그냥 두고는 사군을 설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부여는 당시 1세 해모수 단군-2세 모수리 단군-3세 고해사 단군을 지나 4세 고우루 단군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때 북부여는 국력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한무제의 대대적인 침공은 국가존망의 큰 위기였다. 그런데 이때 고두막한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였다. 그는 의병을 조직하여 곳곳에서 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서기전 108년에 시작된 한나라-북부여 간의 이 대전쟁은 서기전 86년에 이르러 서압록하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북부여가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한무제가 1년 전인 서기전 8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한나라로서는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마천도 그로부터 얼마 못가서 죽고 말았는데 살아생전에 전쟁의 승리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치욕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어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두었다’고 짤막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기록이라는 것은 <조선열전>에 나와 있듯이 좌장군 순체나 누선장군 양복 같은 한나라의 전쟁영웅들은 모두 숙청당하고 위만조선의 고위관리들은 오히려 제후로 봉해졌다는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잘 말해주고 있다. ‘한사군을 두었다’는 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조선상고사에서 한사군의 설치는 지상(紙上)계획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실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북부여의 역사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역사이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고구려가 등장할 때까지 182년간 존속했던 나라였지만 한나라에게 치욕적인 패배의 역사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북부여는 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등장하는 열국시대를 대표하는 나라로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역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부여를 알아야 고구려도 알 수 있고, 백제도 알 수 있고, 신라도 알 수 있다. 북부여가 사라짐으로써 남은 것이라곤 한사군이라는 허구뿐이다.
■ 오피니언 리더들의 각성과 향후 행보
이날 모임에는 문화·언론·학술계를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수 참석하여 한민족 고대사의 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뜨거운 각성의 목소리를 전했다.
• 하태진 시인 (풍욕힐링전문가, 삼족오 추진위원회 위원장):“오늘 강연을 들으며 과거 삼족오 선양 활동을 펼쳤던 소회가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사대주의와 식민사학으로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르게 알고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한민족 고유의 위대한 얼과 혼을 심어주는 계기가 마련되어 가슴 깊이 감동했습니다. 오늘과 같은 배움의 열기가 소수를 넘어 우리 역사를 되찾는 전국적인 국민 운동으로 번창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 김왕식 대표 (『청람서루』):"글을 쓰는 평론가이자 기자로서 주류 사학계의 일방적인 위서론 프레임에 의문을 품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검증하기 위해 참석했다"며, "이번에 창간하는 정론지를 통해 환단고기의 학술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다뤄 학계와 맞서 대화할 준비를 하겠다"고 지성인의 양심을 피력했다.
• 김양수 대표 (영문 외교 전문지 『디플로머시(Diplomacy)』):"케이컬쳐(K-Culture)가 세계를 제패하는 시점에 한민족 문화의 위대한 뿌리 역사를 전 세계에 당당히 전파하는 외교적 전령사 역할을 다하겠다"고 화답하며 강연의 감동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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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총괄한 김종우 사무총장은 "소수 정예로 타오른 불꽃이 대중 지성을 깨우는 역사 광복의 요람이 되고 있다"며 지속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한편, 시민 대상 ‘환단고기 공부모임’ 제3강은 오는 8월 13일(목) 오후 2시에 연속 진행된다. 3회차 강좌에서는 인하대 대학원에서 융합고고학을 전공한 박덕규 박사를 초청하여 “한류의 본류, 풍류 문화”를 주제로 하여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 정통 사상과 문화의 진실을 다채롭고 심도 있게 밝혀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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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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