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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리야크호의 깃발을 러시아 국민에게 돌려주자122년 전 제물포 앞바다의 깃발이 한반도 평화의 작은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실제 바리야크호 모습

1904년 2월 9일, 지금의 인천 앞바다에서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전투가 벌어졌다.

러일전쟁의 서막을 알린 제물포 해전이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순양함 바리야크(Varyag)호와 포함 코레이츠(Koreets)호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 함대와 맞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를 입은 바리야크호는 제물포항으로 돌아왔다.

함장 프세볼로트 루드네프는 배를 일본군의 전리품으로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바리야크호는 스스로 침몰시키고 코레이츠호는 폭파했다.

러시아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패전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으며 마지막에는 함선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러시아 해군의 명예를 지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상징물이 지금 대한민국 인천에 남아 있다.

바로 ‘바리야크호 대군함기’다.

인천시립박물관에 따르면 이 군함기는 가로·세로 2m가 넘는 대형 깃발로,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돼 있다. 제물포 해전의 치열함을 말해주듯 깃발 곳곳에는 구멍과 훼손 흔적이 남아 있다. 러시아 해군을 상징하는 성 안드레기 계열의 깃발이다.

 

러시아 국민에게 바리야크호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 깃발의 문제를 생각하려면 먼저 러시아인의 시각에서 바리야크호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역시 러시아가 제물포 해전의 러시아 해군 장병들을 불리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우며 제국의 명예를 지킨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바리야크호 깃발이 러시아인들에게 애국심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 상징성 때문에 러시아는 과거 이 깃발을 한국에서 빌려가 전시하기도 했다.

 

바리야크호 깃발 대여 예식 장면 (일부 화면은 AI작업)

2010년에는 한·러 우호교류의 상징으로 러시아에 대여됐고 러시아 중앙해군박물관에서 전시됐다. 이후 러시아의 요청으로 대여 기간이 연장됐으나 국내 문화재 관련 규정에 따라 2014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또한 2004년 제물포 해전 100주년을 맞아 인천항에는 바리야크호와 코레이츠호 러시아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 비석에는 매우 인상적인 문장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1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러시아 국민에게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기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한민국이 먼저 손을 내밀면 어떨까?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대한민국 정부와 인천광역시가 법적·문화재적 절차를 충분히 검토한 뒤 바리야크호 대군함기를 러시아 국민에게 영구 기증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면 어떨까.

‘반환’이라는 표현보다 ‘우호와 평화를 위한 영구 기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깃발은 대한민국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이다. 따라서 아무런 검토 없이 해외로 넘길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더욱이 제물포 해전은 우리에게 결코 낭만적인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국토가 열강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결국 을사늑약과 국권침탈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야크호 군함기는 러시아에게는 명예의 상징이지만 우리에게는 ‘힘없는 나라의 국토가 강대국의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뼈아픈 역사의 증거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깃발을 ‘평화의 상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중국에 돌려준 석사자상, 러시아에는 바리야크호 군함기를

올해 1월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문화외교가 있었다.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중국 청대 석사자상 한 쌍을 중국에 기증한 것이다. 이 유물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0년대 일본에서 구입했던 중국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중국 측에 기증됐다. 청와대 역시 이러한 기증이 한중 양국 국민의 우호 정서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해서는 “역사를 기억하고 존중할 때, 국가 간 신뢰는 더욱 깊어진다”고 말했다.

바로 이 정신을 러시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중국 국민에게 의미 있는 중국 문화유산을 우호의 뜻으로 기증했다면, 러시아 국민이 국가적 자긍심을 갖고 기억하는 바리야크호의 군함기를 러시아 국민에게 기증하는 것도 충분히 검토할 만하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깃발을 주었으니 북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식의 거래가 되는 순간 문화외교의 품격은 사라진다.

대한민국이 러시아 국민의 역사와 희생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외교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지금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외교적 상상력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냉전 이후 가장 복잡한 시기 가운데 하나다.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전략적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북한은 최근에도 지역 안보 문제에서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사실상 단절돼 있다. 북한은 핵무력을 포기할 뜻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을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안에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지시하는 등 평양을 향해 유화적 신호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근본적인 대북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쉽게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의 급격한 불안정을 원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전략적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북핵과 미사일, 납북자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은 이 모든 국가 사이에서 한반도 전쟁을 막아야 하는 가장 절박한 당사자다.

과거 6자회담에 참여했던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은 어느 나라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최소공약수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비핵화냐 전쟁이냐, 양자택일을 넘어

이제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도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에 당장 모든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모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협상 자체가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북한을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

그 사이에 현실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전쟁 방지에서 시작해 군사적 긴장을 낮추고, 핵과 미사일 능력의 추가 확대를 동결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며, 상응하는 제재 완화와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긴 호흡의 접근이 필요하다.

비핵화를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핵화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인 길을 다시 설계하자는 것이다.

지금의 이재명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와 평화공존을 강조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정상외교 재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 역시 당장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지만 김정은과 트럼프의 개인적 관계 자체까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신호들을 종합하면 대화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목한다

오는 9월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방경제포럼이 열린다. 이 무대에서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현재로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북·러 관계가 급속도로 깊어지고 있는 만큼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을 한국은 예의주시해야 한다.

러시아는 이제 북한 문제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국가가 됐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북·러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대한민국에는 러시아와 대화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진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면 대한민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외교적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당당한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나라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필요도 없고 중국에 필요 이상으로 저자세를 취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요구에 굴복할 이유도 없다.

한미동맹이라는 안보의 축은 굳건하게 유지하면서 중국과는 경제·문화 협력을 확대하고, 러시아와는 한반도 평화와 극동개발의 새로운 협력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일본과도 역사 문제에서는 원칙을 지키되 동북아 평화와 안보를 위한 협력의 문은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외교다. 강대국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이 외교가 아니다.

상대국의 역사와 국민을 존중하면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원칙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외교다.

 

122년 전 전쟁의 깃발을 21세기 평화의 깃발로

바리야크호의 군함기가 한반도의 핵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푸틴 대통령이 이 깃발 하나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국제관계에는 군사력과 경제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있고 기억이 있으며 국민의 감정과 국가의 자존심이 있다.

122년 전 제물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수병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그 깃발을 대한민국이 21세기의 평화와 우정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담아 러시아 국민에게 건넨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122년 동안 인천이 간직해 온 러시아의 역사적 기억을 대한민국 국민의 우정과 함께 러시아 국민에게 전합니다. 이제 제물포 앞바다의 전쟁을 기억하면서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새로운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중국에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우정으로 전했고, 러시아에는 러시아 국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역사적 상징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신뢰를 한·러 관계 복원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으로, 다시 서울과 워싱턴·베이징·도쿄로 이어지는 새로운 평화의 길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외교에는 때때로 거대한 협정 하나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의 상징이 더 오래 남는다.

1904년 제물포 앞바다에서 내려진 바리야크호의 깃발. 이제 그 전쟁의 깃발을 2026년 대한민국이 ‘평화의 깃발’로 다시 띄워보면 어떨까?

한반도의 영구평화가 요원해 보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평화는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먼저 작은 길을 내야 한다.

대한민국이 그 길을 먼저 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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