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전 벼가 패야 한다”… 옛 농부들은 바람과 비 살피며 한 해 풍흉 점쳐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물러가고 풀잎 끝에 맑은 이슬이 맺히는 계절이 찾아왔다.
오늘 9월 7일은 동지로 시작하는 24절기 가운데 열여덟 번째 절기인 백로(白露)다. 한국천문연구원의 2026년 월력자료에 따르면 올해 백로는 9월 7일 오전 11시 22분에 들었다. 백로는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자리하며 태양의 황경이 165도에 이르는 때다.
백로는 글자 그대로 ‘흰 이슬’을 뜻한다. 이 무렵 밤 기온이 내려가면서 대기 중 수증기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로 맺히기 시작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작은 이슬방울에서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을 읽었다.
백로 무렵에는 장마가 물러난 뒤 비교적 맑고 쾌청한 날이 이어지면서 들녘의 곡식이 본격적으로 여물어간다. 반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이 곡식을 쓰러뜨리거나 해일 피해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어 농가에서는 날씨 변화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특히 백로는 벼농사에서 중요한 기준점이었다. 예부터 벼는 늦어도 백로 무렵에는 이삭이 패야 제대로 여물 수 있다고 여겼다. 기온이 점차 낮아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늦게 팬 벼는 충분히 결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주지역 등에 전해지는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라는 말도 이러한 농경 경험에서 비롯됐다. 백로가 되도록 이삭이 패지 않은 벼는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기상청의 절기 자료에도 ‘백로 전 미발이면 알곡 수확물이 없다’는 옛말이 소개돼 있다.
옛 농부들은 백로 전후의 바람과 비도 유심히 살폈다. 백로 무렵 바람이 강하면 벼농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여겼고, 반대로 비를 풍년의 징조로 받아들이는 지방도 있었다.
특히 경남 섬 지역에서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늘인다”는 말이 전해진다. 백로 무렵 적당한 비가 내리면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이 든다는 농민들의 오랜 경험이 속담으로 남은 것이다.
백로는 농사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도 하나의 쉼표였다. 고된 여름 농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추수가 시작되기 전 잠시 일손을 놓을 수 있는 시기였다. 추석을 앞두고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고, 부녀자들이 친정 부모를 찾아뵙는 근친(覲親)의 풍속도 있었다.
옛사람들은 달력의 숫자보다 풀잎의 이슬과 바람의 방향, 벼 이삭의 빛깔을 보며 계절을 읽었다. 백로는 단순히 ‘가을의 한 절기’가 아니라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살펴 농사의 때를 판단하고 삶의 리듬을 조절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날이다.
오늘 아침 풀잎 끝에 맺힌 작은 이슬 한 방울은 그래서 특별하다.
뜨거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결실의 계절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자연의 조용한 편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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