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10일은 음력 7월 29일이다.
약 2천 년 전 가락국을 세운 김수로왕과 먼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부부의 연을 맺은 시점으로 새롭게 주목해 볼 만한 날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성혼일을 음력 7월 27일로 소개한 언론과 자료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2 「기이」에 수록된 「가락국기」를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면 두 사람의 성혼 날짜가 7월 27일이라고 직접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니다.
「가락국기」가 분명하게 밝히는 날짜는 7월 27일과 8월 1일이다.
그리고 그 사이 두 사람이 ‘합환(合歡)’한 뒤 ‘두 밤과 한 낮’을 함께 보냈다는 매우 중요한 시간 기록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기록을 역으로 따라가 보면 어떨까.
7월 27일, 이야기가 시작되다
「가락국기」는 건무(建武) 24년 무신년, 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건무 24년 무신 7월 27일 구간(九干) 등이 수로왕을 조회했다는 내용이다.
구간들은 아직 왕비를 맞지 않은 수로왕에게 좋은 배필을 선택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수로왕은 자신이 이 땅에 내려와 왕이 된 것도 천명이며 자신과 짝을 이루어 왕후가 되는 것 역시 하늘이 정할 일이라고 답했다.
이어 유천간(留天干)을 망산도(望山島)로 보내 기다리도록 하고 신귀간(神鬼干)은 승점(乘岾)으로 보냈다.
![]() |
| 허황옥 일행의 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는 구간들의 모습 |
얼마 뒤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가 나타났고, 유천간 등이 이를 발견해 횃불을 올렸고 신귀간은 왕궁으로 달려가 수로왕에게 보고했다.
수로왕은 구간들을 보내 일행을 맞도록 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공주는 처음 보는 사람들을 경솔하게 따라갈 수 없다며 곧바로 왕궁으로 들어가기를 사양했다.
구간들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자 수로왕은 궁궐 서남쪽에 장막을 쳐 임시 궁전인 유궁(帷宮)을 설치하고 직접 공주를 기다렸다.
공주는 별포(別浦)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산신에게 폐백하는 의례를 행한 뒤 수로왕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수로왕은 직접 나아가 공주를 맞았고 두 사람은 함께 유궁으로 들어갔다.
![]() |
| 김수로왕과 허황후, 이미지출처=허황옥 3일 |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뒤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직접 밝힌다.
「가락국기」의 유명한 구절이다.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黃玉 年二八矣”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허황옥은 부모가 꿈에서 상제의 명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보낸 신성한 인물이지만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 짝을 이루게 하라는 명이었다.
수로왕 역시 먼 곳에서 공주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고 청했음에도 따르지 않았다고 답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는다.
‘두 밤과 한 낮’이 알려주는 시간
「가락국기」는 이 장면을 매우 함축적으로 기록했다.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마침내 합환하여 ‘두 번의 맑은 밤을 보내고 한 번의 낮을 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명확한 날짜가 등장한다.
“八月一日廻鑾 與后同輦…徐徐入闕 時銅壺欲午”
8월 1일 수로왕이 왕후와 같은 수레를 타고 천천히 궁궐로 돌아왔으며 그때가 정오 무렵이었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 ‘두 밤과 한 낮’과 ‘8월 1일 입궐’이라는 기록이 두 사람의 성혼 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날짜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놓아보면...
「가락국기」의 기록을 하나의 시간선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날짜 | 주요 사건 |
|---|---|
| 음력 7월 27일 | 구간들이 수로왕을 조회하고 왕비를 맞을 것을 건의 |
| 7월 27일 이후 | 유천간을 망산도, 신귀간을 승점으로 보냄 |
| 날짜 미상 |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단배 출현 |
| 날짜 미상 | 신귀간이 수로왕에게 보고 |
| 날짜 미상 | 구간들이 공주 일행을 영접 |
| 날짜 미상 | 공주가 곧바로 입궐하기를 사양 |
| 날짜 미상 | 수로왕이 유궁을 설치하고 기다림 |
| 날짜 미상 | 허황옥이 별포에 상륙하고 산신에게 폐백 |
| 날짜 미상 | 수로왕과 허황옥이 만나 유궁에 들어감 |
| 음력 7월 29일 무렵 추정 | 두 사람이 합환(合歡), 부부의 연을 맺음 |
| 7월 29일 밤 추정 | 첫 번째 밤 |
| 7월 30일 낮 추정 | 한 낮 |
| 7월 30일 밤 추정 | 두 번째 밤 |
| 8월 1일 | 왕과 왕후가 같은 수레를 타고 정오 무렵 입궐 |
여기에서 7월 27일과 8월 1일은 사료에 직접 등장하는 날짜다.
반면 7월 29일은 사료에 ‘성혼일’이라고 직접 적혀 있는 날짜가 아니다.
그러나 8월 1일 입궐을 기준으로 ‘두 밤과 한 낮’을 역산하면,
‘7월 29일 합환 → 29일 밤 → 30일 낮 → 30일 밤 → 8월 1일 입궐’
이라는 시간 배열이 자연스럽게 성립한다.
따라서 음력 7월 29일은 확정된 성혼일이라기보다 「가락국기」가 남긴 시간 기록을 토대로 새롭게 주목할 수 있는 유력한 성혼 시점이라 할 수 있다.
허황옥은 정말 인도에서 곧바로 왔을까?
성혼일 못지않게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다.
「가락국기」에서 허황옥은 자신을 분명히 ‘아유타국 공주’라고 소개한다. 오늘날 아유타국을 북인도 아요디아와 연결하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유타국의 정확한 위치와 허황옥의 실제 이동경로는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다.
특히 고고학자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가 오랫동안 추적한 이른바 ‘허황옥 루트’가 눈길을 끈다.
![]() |
| 허황후의 릉 |
현재 김해의 수로왕비릉 비석에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는 명칭이 전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허황옥에게 전해지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명칭에 주목해 중국 쓰촨성 안악현 일대를 현지 조사했다. 이는 중국 안악현 정부가 현재 지역 소개에서 안악을 “옛 이름이 보주”라고 설명하면서 역사문화 인물 가운데 ‘普州太后 許黃玉(보주태후 허황옥)’까지 직접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로왕비릉의 비석은 허황옥 당대의 유물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지만, 오히려 비석이 세워질 당시 중국 쓰촨성 안악현 일대가 이미 보주라는 역사적 지명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병모 교수의 현장조사와 관련 연구를 통해 오늘날 중국 쓰촨성 안악현, 즉 후대에 보주(普州)로 불린 지역의 허씨 집성촌이 있었으며 허씨 종산에 ‘신정(神井)’이라는 우물이 전해진다고 소개한다.
![]() |
| 보주 허여황옥 금석문 신정기 |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신정에 관한 기록에 ‘허황옥’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관련 기록은 후한 초기 허씨 집성촌에 황옥이라는 여성이 살았으며 용모가 뛰어나고 지혜로웠다는 내용의 전승을 담고 있는 것으로 소개돼 왔다.
이 인물이 『가락국기』의 허황옥과 동일인인지는 아직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와 이름, 허씨 집단, 보주라는 공간적 단서가 중첩된다는 점에서 보다 면밀한 조사와 검증이 필요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허황옥 도래 전해인 서기 47년, 중국 남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여기에 반드시 함께 살펴볼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가락국기」가 허황옥의 가락국 도착을 건무 24년, 즉 서기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그 전해인 건무 23년, 서기 47년 중국 남부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무력 충돌과 주민 이동이 실제로 발생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서기 47년 정월 남군(南郡)의 이민족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후한 광무제는 무위장군 유상(劉尙)을 보내 이를 진압했다. 관련 주석에는 유상이 이들을 격파한 뒤 그 종족 7천여 명을 강하(江夏)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전한다.
이는 단순한 소규모 충돌이 아니라 수천 명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강제적인 인구 이동이었다.
같은 해 무릉(武陵)에서도 큰 사건이 발생했다. 『후한서』 「남만서남이열전」에 따르면 무릉의 지도자 상단정(相單程) 등이 험준한 지역을 장악하고 군현을 공격했다.
후한 조정은 남군·장사·무릉에서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유상에게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상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숙이 진입했다가 산세와 수로를 이용한 공격을 받아 군대가 크게 패했고 사실상 전멸했다. 사태는 서기 47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건무 24년, 바로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했다고 전해지는 서기 48년에도 상단정 등의 세력이 임원(臨沅)을 공격했고 후한 조정은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사료를 통해 적어도 서기 47~48년 중국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반란과 토벌, 대규모 군사작전, 강제이주가 연속적으로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서기 47년 중국 남부의 남군과 무릉 일대를 중심으로 후한 조정과 현지 비한족 집단 사이에 대규모 무력 충돌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천 명 규모의 강제이주까지 발생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대적 상황이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연구하는 데 흥미로운 배경을 제공한다.
만약 아유타계 또는 인도계 집단 일부가 한대 중국에 들어와 여러 세대 동안 남부 또는 서남부 지역에 정착해 있었다면, 서기 47~48년의 군사적 격변과 주민 이동이 그들의 새로운 이동을 촉발했을 가능성은 하나의 연구 가설로 검토할 수 있다.
특히 허황옥의 가락국 도착 연대인 서기 48년과 중국 남부의 격변기가 시간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점은 앞으로 중국 사료와 지역사를 보다 정밀하게 대조해 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姓許 名黃玉’이라는 이름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만약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김해까지 직접 항해해 온 공주라면 왜 「가락국기」는 그녀의 이름을 ‘姓許 名黃玉’ 즉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라고 기록했을까?
‘姓○ 名○’은 한자문화권에서 성과 이름을 구분해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장 구조다.
물론 『삼국유사』가 13세기에 편찬됐고 그 속의 「가락국기」 역시 후대에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외국계 인물의 이름이나 전승이 한문으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중국식 성명 구조로 정형화됐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姓許 名黃玉’이라는 표현 하나만으로 허황옥이 중국에서 살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허황옥이나 그 선대가 중국 한자문화권에서 상당 기간 생활했을 가능성 역시 하나의 연구 가설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아유타국 공주’와 ‘중국 보주 경유설’은 반드시 서로 배치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인도 또는 아유타계의 뿌리를 가진 집단이 중국으로 이동해 여러 세대를 거쳐 생활하다가 후한시대의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다시 이동했고, 그 일부가 바닷길을 통해 가락국에 도달했다는 가설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세대별 이동경로는 아직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문헌·고고학적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다.
허황옥은 단순한 ‘혼인 공주’였을까?
허황옥의 행동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락국기」 속 허황옥은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구간들이 자신을 왕궁으로 안내하려 하자 처음 보는 사람을 경솔하게 따라갈 수 없다며 거절하며, 육지에 오른 뒤에는 산신에게 폐백하는 의례를 행한다. 또한 수로왕 앞에서는 자신의 출신과 이름, 나이, 자신이 가락국까지 오게 된 이유를 직접 설명한다.
그녀는 상당한 물품과 수행원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으며 수로왕 역시 직접 유궁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이러한 모습은 적어도 「가락국기」가 허황옥을 단순히 혼인을 위해 보내진 여성 이상의 권위와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부 연구에서는 허(許)라는 명칭을 세습적 종교·제의 직능과 연결해 해석하고, 인도의 브라만과 같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집단과 비교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물론 현재의 자료만으로 허황옥의 종교적·정신적 지위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 보주 허씨 집성촌에서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돼 온 신정(神井)에 ‘허황옥’이라는 여성의 이름이 특별히 남아 있다는 점은 가볍게 넘길 대목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 ‘황옥’이라는 여성의 이름이 신정(神井)과 연결되어 기록되고 기억되었을까?
이는 그녀가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허씨 집단 안에서 특별한 위상을 지녔거나, 제의와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제사장 같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허황옥은 단순한 왕실의 공주를 넘어 고도의 정신문화적 전통을 지닌 집단의 중요한 인물로서 가락국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보주 허씨 집성촌의 신정 전승에 ‘허황옥’이라는 이름이 남게 된 배경과 그 인물의 실제 위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앞으로 반드시 밝혀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연구 과제다.
9월 10일, 2천 년 전의 인연을 기억하며
오는 9월 10일은 음력 7월 29일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남긴 기록을 따라가면 약 2천 년 전 어느 날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바다를 건너왔다.
배에서 내린 열여섯 살의 공주는 자신의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라고 밝혔고, 수로왕은 직접 그녀를 맞았으며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고 ‘두 밤과 한 낮’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8월 1일 정오 무렵 왕과 왕후는 같은 수레를 타고 가락국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 기록을 역산하면 음력 7월 29일은 두 사람이 성혼한 시점으로 새롭게 주목할 만한 날이다.
물론 이를 확정된 역사적 성혼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력 7월 29일을 계기로 수로왕과 허황후의 만남을 기억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연구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더욱이 허황옥의 이야기는 한 왕과 한 공주의 사랑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뒤에는 인도 아유타국과 중국 대륙, 그리고 바다 건너 가락국을 연결했을지도 모르는 고대인의 이동과 문명교류의 거대한 길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하기 불과 1년 전 중국 남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토벌, 수천 명의 강제이주는 당시 동아시아가 결코 정적인 세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전쟁과 정치적 격변은 사람들을 움직였고, 사람들의 이동은 다시 기술과 문화, 신앙과 혈연을 새로운 땅으로 옮겼다.
![]() |
| 2019년 발행된 허황후 관련한 우표 |
2천 년 전 허황옥은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느 길을 지나 가락국에 왔는가? 그리고 그 여인은 과연 누구였는가?
음력 7월 29일을 맞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혼의 아름다운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삼국유사』가 남긴 기록과 『후한서』 등 중국 사료, 그리고 인도와 중국에 흩어진 단서들을 다시 모아 허황옥의 진짜 여정을 찾아가는 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