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 않고 살 수 있을까? "
![]() |
|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삶은 소통이다.... 밥 길, 말길
사람 삶에서 먹고 말함에 문제없음은 ‘큰 숨’ 쉬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근본전제라 할 것이다. 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말은 입에서 나온다. 밥과 말이 ‘잘’ 들어가고 잘 나올 수 있을 때, 기본적으로, 잘 산다고 할 것이다. 밥과 말의 이러한 나들이 내지 흐름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봄 처녀들이나 봄 병아리들의 나들이에서는 나간 자가 다시 나간 곳을 통해 들어오지만, 밥과 말의 나들이는 그렇지 않다. 입에서 나가고 귀로 들어오고, 입으로 들어오고 다른 곳으로 나가며, 나간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온다. 내가 한 말을 내가 들을 때를 뺀다면...
이러한 나들이는 소통이다. 소통에서 나드는 길이 중요하다. 나가고 들어오는 길이 막힐 때 문제가 생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고도 했던가? 문자 그대로, 통하면 안 아프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이다.
나들고 오가는 길을 인위적으로 막고 트는 장치가 문(門)이다. 막힌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닐 것이다. 오갈 밥이 없거나 오갈 길이 막혀서 밥이 못 들어가고 못나올 때, 숨을 못 쉬고 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말이 못 나오고 못 들어갈 때도 못 살게 될까? 이 문제는 밥의 문제보다 더 생각해야 할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밥이 들어가야 말이 나오기 쉽고, 말이 나와야 또 밥이 들어가기 쉬운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일자리와 관련된 각종 시험, 상품판매와 관련된 각종 광고나 계약서 작성, 각종 매체들이 전하는 말들만 보아도, 이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밥과 관련된 말들이라 할 것이다. 어떤 고래들은 자신들의 말로 소통하며 협동하면서 물고기들을 사냥하여 밥으로 먹고 산다.
‘힘없는 사람은 억울한 일 당해도 아무 소리 못하고 살아야 하나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여름 이후 그 생각뿐이었죠.’ ‘회사 내에서 선량한 풍속을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박씨는 13년 다닌 회사에서 해고됐다. ‘억울하죠. 저는 성희롱 당한 것을 외부에 말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거잖아요.’ 그가 참석도 하지 않은 채 인사위원회는 열렸으며, 해고는 문자 메시지로 일방적으로 통보됐다.
막힌 말길 속에 피해자는 쉽게 가해자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른바 ‘가해’의 대가로 받는 ‘피해’는 무엇보다 일자리를 잃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길 크기는 밥 길 크기, 살길크기로 바로 이어진다.
어렸을 때, 장마나 태풍 등으로 동네 앞들에 물난리가 나곤했다. 그럴 때마다 작물이 있는 논밭은 저수지로 된다. 물이 빠져나갈 물길의 크기가 충분하지는 못해서이다.
이때 물과 작물의 ‘부적절한 만남’이 일어나면서, 물은 작물을 못살게 한다. 사람들은 노심(勞心)하고 초사(焦思)하며 머리와 입을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 실행에 옮긴다. 그런 와중(渦中)에서 물길이 다시 열릴 때, 곡식도 살고 사람도 산다. 이렇게 말길, 발길, 물길, 밥 길, 숨길 등을 트는 일은 서로 연결된다.
다 사람, 다 입
그러나 위와 아래 혹은 나와 남이 ‘너무 나뉘는’ 혹은 ‘잘못 나뉘는’ 작은 세상크기와 작은 소통크기에서는, 먹고 말하는 ‘입’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균형 있게 조율되거나 추구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한 쪽 입만이 온전하게 먹는 입일 수 있고, 한 쪽 입만이 온전하게 말하는 입일 수 있기가 쉽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지만 너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위의 입은 입이지만 아래의 입은 입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고 입은 ‘다 같은 입’으로서 ‘다 먹을 수’ 있고 ‘다 말할 수’ 있을 때, ‘하늘 위의 존재와 동급인’ 하늘 아래의 존엄한 사람들은 ‘다 사람’일 수 있는 토대를 보장받는다고 할 것이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말하듯이, ‘하늘과 같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입을 다 같이 가질 때, 기본적으로 다 사람일 수 있음에서 출발하는 철학을 일단 ‘다 입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와 아래, 나와 남 나아가 사람과 사물 사이에 ‘잘못 나뉘는’, ‘너무 나뉘는’ 작은 세상크기와 소통크기 속에 ‘다 입’의 태도나 기회가 희미해지면서, 힘이 없거나 가진 것이 적은 자들이 말하고 먹는 관심은 잊혀 지거나 억눌리기 쉽다.
이들이 사는 방식은, 자신이 먹고 말하는 삶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이기는커녕, 다무는 입을 ‘자연스런’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이런 입에 ‘겉으로만’ 동의하고 따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신이 먹고 말하는 관심이 혹은 먹고 살기 위해 말하는 관심이, 남들에 의해 억지되고 왜곡되거나 남 혹은 위 위주(爲主)로 결정될 때, 자신의 사람크기, 삶의 크기는 크게 작아진다. 소통이 잘 될 때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느낄 때 소통이 잘 된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와 관습, 제도에서 혼자만 말하고 결정하는 일은 흔하다. 혼자 혹은 일부분 사람들만 말할 수 있거나, 대상이나 방식에서 정해진 것만 말할 수 있을 때, 필요한 말은 못하고 불필요한 말은 들어야 할 때, 소통크기는 크게 작아진다. 소통크기가 작아질 때, 만남크기도 작아지면서 소통하는 개인들의 불행과 갈등은 싹트거나 억눌린다.
따라서 함께 먹고 함께 말하는 삶에서, 남의 억누름과 나의 억눌림 혹은 나의 억누름과 남의 억눌림을 서로 피하고 막으려는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나에게로 들어오거나 나로부터 나가는 억누름을 머리로 판단하고 몸으로 막을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일 것이다.
유력자(有力者)인 위의 억누름과 무력자(無力者)인 아래의 억눌림의 ‘수직주의적’ 만남문화는 일부 사람들의 ‘일정한’ 행복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역행하는 것이다.
위가 누구든 상관없다. 나도 남도 군림하는 위가 될 수 있다. 갑질로도 쉽게 이어지는 군림은 불통과 비례한다고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