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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의 천년 제향에서 조선 선비의 정신을 만나다가락대전종친회, 산청 덕양전 추향대제에 김종성 회장 아헌관·종친 11명 전사관 참여…유네스코 세계유산 남계서원에서 실천과 배움의 가치 되새겨

가락의 오랜 역사와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는 제향의 전통이 깊어가는 가을, 경남 산청에서 다시 이어졌다.

 

가락대전종친회 덕양전 제향 참여자 기념 사진

가락대전종친회(회장 김종성) 종친 30여 명은 가락국 제10대 양왕(讓王)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는 산청 덕양전(德讓殿) 추향대제에 참석한 뒤,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양의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을 둘러보는 가을 인문학 기행을 가졌다.

가락의 춘·추향대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각각 3일간 봉행되는 가락중앙종친회에서 가지는 전통 제향이다. 춘향대제는 음력 3월 15일, 추향대제는 음력 9월 15일에 시작되며, 두 대제 모두 첫째 날 김해, 둘째 날 산청, 셋째 날 경주에서 차례로 봉행된다.

가락대전종친회는 이번 추향대제 둘째 날인 음력 9월 16일 산청 덕양전에서 열린 제향에 참여했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300여 명의 종친이 함께한 가운데 가락국 제10대 양왕을 추모하는 대제가 엄숙하게 봉행됐다.

 

덕양전 제향 참여 주요 제관의 모습

특히 김종성 회장이 아헌관(亞獻官)을 맡아 초헌관에 이어 두 번째 헌작을 올렸으며, 대전 종친 11명은 제향 준비와 진행을 담당하는 전사관(典祀官)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대전 종친들이 제향의 주요 직책을 맡아 참여한 것은 전국 종친사회에서 가락대전종친회의 높아진 위상과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뜻깊은 장면이었다.

선조를 기리는 제향에서 역사를 배우는 인문학으로

산청 덕양전은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역사적 공간이다.

양왕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역사적 전환기에 왕권보다 백성의 생명과 안위를 우선하여 평화로운 귀부를 선택한 군주로 알려진다. 그의 결단은 가락국 왕조의 막을 내렸지만 가락의 역사와 정신이 신라로 이어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양왕의 후손인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후손들이 덕양전에서 제향을 올리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 왕을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왕의 애민정신과 대의적 결단을 기리며 가락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은 이날 대제를 마친 뒤 곧바로 귀향하지 않고 산청과 인접한 함양의 역사문화유산을 찾아 나섰다.

그 첫 번째 탐방지가 남계서원(灆溪書院)이었다.

남계서원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을 기리는 서원이다.

정여창은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학문을 지식의 축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선비였다.

 

정여창, 배운 것을 삶으로 실천한 선비

정여창은 성종 때 관직에 진출했고, 연산군 시기에는 안음현감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1504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이미 사망한 그에게 부관참시의 형벌까지 내려졌다.

한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가 정치적 격변 속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이었다.

그러나 정여창이 남긴 학문과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을 단순히 책 속의 지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완성과 올바른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현장 해설사는 정여창의 삶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정치인들이 수많은 공약을 내놓지만 이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러한 설명은 수백 년 전 선비의 정신이 오늘날의 정치와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던지고 있음을 일깨웠다.

 

한 선비의 뜻으로 시작된 12년의 서원 건립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뒤 약 반세기가 흐른 1552년, 함양의 유학자 개암 강익(介庵 姜翼, 1523~1567)은 지역 유림들과 함께 정여창을 추모하고 후학을 교육할 서원 건립에 나섰다.

당시 서원 건립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계서원은 지역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곡식과 재물을 모으고 노동력을 보태며 오랜 기간 공사를 이어갔다.

이날 해설을 맡은 정효순 해설사에 따르면 지방관이 교체될 때마다 지원 여부가 달라져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으며, 주요 건물과 부속시설을 갖추기까지 약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1552년 시작된 서원 건립은 1564년 무렵 주요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1566년에는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조선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이후 서원 건축의 전형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락대전종친회의 남계서원 방문

서원의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는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한다.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다.

연못과 누각, 매화와 소나무 역시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연꽃은 군자의 고결한 품성을, 매화는 추위를 이겨내는 절개를, 소나무는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했다.

자연과 건축, 학문과 수양이 하나로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서원 철폐령을 넘어 세계유산으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은 서원이 붕당정치의 거점으로 변질되고 각종 특권으로 지방사회에 부담을 준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서원 정리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1871년 전국의 서원과 사우 가운데 47개만 존속시키는 대규모 철폐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서원이 사라졌지만 남계서원은 존속했다.

정여창이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는 사실과 남계서원이 지닌 학문적·역사적 위상은 그 존속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2019년 남계서원은 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되었다.

 

가락대전종친회의 남계서원 방문

이는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과 선현 제향을 중심으로 형성된 독특한 문화적 전통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과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도 남계서원이 지켜온 것은 결국 건축물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이었다.

 

늦가을 서원에서 발견한 인문학의 작은 행복

김종성 회장과 함께한 가락대전종친회 종친 30여 명에게 이번 탐방은 역사적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않았다.

늦가을의 정취가 내려앉은 서원에서 오래된 건축물과 연못, 소나무를 바라보며 선비들의 삶을 상상하고,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같은 뿌리를 가진 종친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역사를 통해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누린 것이다.

이러한 여정은 인문학이 반드시 어렵고 거창한 학문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고, 자연 속에서 옛사람들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인문학은 충분히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선조를 추모하는 제향이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는 시간이라면, 서원을 찾는 인문학 여행은 그 뿌리 위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정여창이 남긴 실천의 정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의 가을 여정과 만났다.

뿌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역사를 배우는 사람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한다.

전국 300여 명의 종친이 함께한 산청 덕양전 추향대제에서 시작해 조선 선비의 정신이 살아 있는 남계서원으로 이어진 이번 가을 인문학 여행은 선조에 대한 공경과 배움의 기쁨이 하나로 어우러진 뜻깊은 시간으로 남았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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