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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알고도 도망치지 않은 선비, 청계서원에서 만난 역사의 양심가락대전종친회, 산청 덕양전 추향대제 후 함양 청계서원 탐방…무오사화에 희생된 김일손의 절개와 역사 기록의 정신 되새겨

가락국 제10대 양왕을 기리는 산청 덕양전 추향대제를 마친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의 발걸음은 함양의 남계서원에 이어 청계서원(靑溪書院)으로 향했다.

김종성 회장과 30여 명의 종친들이 함께한 이번 가을 인문학 기행은 선조를 기리는 제향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조선 선비들의 학문과 절의, 역사적 양심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가락의 춘·추향대제는 봄과 가을에 각각 3일 동안 봉행되는, 가락중앙중친회가 주최하는 전통 제향이다. 춘향대제는 음력 3월 15일, 추향대제는 음력 9월 15일에 시작되며, 첫째 날 김해, 둘째 날 산청, 셋째 날 경주에서 차례로 봉행된다.

가락대전종친회는 이번 추향대제 둘째 날인 음력 9월 16일 산청 덕양전 제향에 참여했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300여 명의 종친이 참석한 가운데 가락국 제10대 양왕을 추모하는 대제가 봉행됐다.

 

가락대전종친회 전사관과 중앙회 김경수 청년회장의 모습

특히 김종성 회장이 아헌관을 맡고 대전 종친 11명이 전사관으로 참여하면서 가락대전종친회의 높아진 위상과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였다.

이처럼 뜻깊은 제향을 마친 뒤 이어진 역사문화 탐방은 종친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배움과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지리산에서 맺어진 두 선비의 인연

청계서원은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는 공간이다.

김일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관으로, 역사 기록의 진실성과 정치적 비판 정신을 중시했던 인물이다. 또한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를 대표하는 선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남계서원에 배향된 정여창과도 깊은 학문적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지리산을 유람하며 학문과 세상사를 논했던 인연으로도 전해진다.

당시 지리산은 단순한 유람지가 아니었다. 선비들에게 산천을 유람하는 일은 자연의 이치를 살피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중요한 수양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조선 정치는 급격한 갈등과 대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여창은 안음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김일손은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과 지방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해설사에 따르면 정여창은 함양을 찾는 김일손에게 머물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주었고, 김일손은 그곳에 청계정사를 지어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다고 한다.

오늘날 청계서원 일대에 전해지는 두 사람의 인연은 개인적 우정을 넘어 조선 사림이 추구했던 학문적 연대와 도덕적 신뢰를 상징한다.

한 편의 글이 불러온 무오사화의 비극

1498년 연산군 4년, 조선 정계를 뒤흔든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했다.

사건의 핵심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있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을 빌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 글이다.

김일손은 사관으로 활동하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수록했다.

사초는 훗날 왕의 통치와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다.

사관에게 사초는 개인의 의견을 마음대로 적는 문서가 아니었다. 후대에 역사의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이 담긴 공적 기록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기록이 당시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다는 점이다.

훈구파 인물 이극돈은 자신의 행적과 관련한 불리한 기록이 사초에 남는 것을 꺼렸고, 김일손과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유자광 등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결국 무오사화는 단순한 문장 해석의 논쟁이 아니라 왕권과 훈구 세력, 새롭게 성장하던 사림 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그 결과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김종직은 이미 사망한 뒤였음에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정여창을 비롯한 여러 사림 인사도 유배 등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사초를 지우라는 압력, 그리고 사관의 양심

무오사화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보여준 태도다.

역사 기록은 권력자의 업적만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치와 부당한 권력 행사 역시 기록하여 후대가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사관의 중요한 책무였다.

김일손은 사초에 남긴 기록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겪었지만, 권력자의 요구에 따라 기록을 마음대로 고치는 일을 거부한 인물로 평가된다.

당시 사관에게 이러한 태도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왕과 고위 관료의 잘못을 기록하는 일은 자신의 관직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탁영 김일손 선생의 유허비

그럼에도 조선의 사관들은 원칙적으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역사 기록을 지향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사관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와 시대적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김일손의 사례는 역사 기록의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후대에 남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권력자가 원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김일손의 비극은 바로 그 위험성을 오늘날까지 일깨우고 있다.

죽음을 피하라는 경고,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

청계서원 현장에서 전해 들은 해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김일손이 체포되기 직전의 이야기였다.

이날 해설을 맡은 정효순 해설사에 따르면 당시 김일손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김굉필은 사화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일손은 자신이 체포되면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청계정사에 머물며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 대목은 현장에 전해지는 역사 해설의 내용으로, 구체적인 경고 전달 과정과 당시 김일손의 심경까지 확정된 사료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신념과 역사적 책임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한 선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결국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1498년 능지처사형을 받아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과 신념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리고 권력의 위협 앞에서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은 어디까지 자신의 책임을 지켜야 하는가?

무오사화의 뿌리, 유자광과 김종직의 악연

무오사화의 배경에는 개인적 원한과 정치적 대립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자광과 김종직이다.

두 사람의 갈등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건이 함양의 학사루(學士樓) 현판 이야기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하도록 했다.

이 사건은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훗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정치적 문제로 떠오르자 유자광은 이를 사림파 공격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물론 무오사화를 두 사람의 개인적 감정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건의 근본에는 중앙 정치권의 권력 경쟁, 훈구와 사림의 갈등, 왕권을 둘러싼 긴장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사루의 시판 이야기는 개인적 갈등이 정치적 대립과 결합할 때 얼마나 큰 비극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오래된 소나무에 깃든 선비의 절개

청계서원에서 종친들의 눈길을 끈 것은 오래된 소나무였다.

해설사는 이 소나무의 수령을 약 200~250년으로 소개하면서, 서원을 다시 조성할 당시 기존의 나무를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청계서원의 전경

이 소나무가 김일손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졌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소나무의 모습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비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한 시대의 권력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가치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시간은 역사를 책으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한다.

눈앞의 나무와 건물, 오래된 돌 하나가 수백 년 전의 사람과 사건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이 역사 현장을 직접 찾는 인문학 여행의 특별한 가치일 것이다.

권력은 지나가고 기록은 남는다

청계서원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권력은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지만, 권력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감추거나 지우려는 유혹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정치권력과 언론, 공적 기록과 정보의 투명성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김일손이 살았던 시대에는 사초를 둘러싼 갈등이 목숨을 앗아가는 정치적 참극으로 이어졌다.

현대사회에서는 헌법과 법률, 언론의 자유와 기록관리 제도 등을 통해 권력의 자의적 개입을 견제하고자 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그 근본적인 질문은 같다.

누가 역사를 기록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록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김일손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비의 용기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와 후세에 대한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한때 절대적인 힘을 가졌던 인물들도 세월이 흐르면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기록이 사라지면 그 평가조차 불가능해진다.

권력은 한 시대를 지배할 수 있지만, 진실한 기록은 시대를 넘어 권력을 심판한다.

산청 덕양전에서 시작해 함양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으로 이어진 가락대전종친회의 가을 인문학 여행은 그렇게 선조를 기리는 마음에서 출발해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되새기는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늦가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향기 속에서 종친들이 함께 나눈 작은 기쁨과 행복은 먼 훗날까지 기억될 또 하나의 소중한 가락 공동체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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