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덕양전에서 가락국 제10대 양왕을 기리는 추향대제를 봉행한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의 가을 인문학 여행은 함양으로 이어졌다.
김종성 회장과 함께한 30여 명의 종친들은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조선 선비들의 학문과 절의를 살펴본 뒤 함양 개평한옥마을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박병호 문화관광해설사가 마을의 역사와 한옥의 구조 그리고 옛사람들의 생활문화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앞서 남계서원에서 정여창의 학문적 정신을 만났다면 개평한옥마을에서는 그 정신이 이어져 온 삶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동 정씨의 집성촌, 살아 있는 한옥마을
개평한옥마을은 경남 함양군 지곡면에 자리한 전통마을로 하동 정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터전을 이루어 온 곳이다.
특히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일두 정여창의 가문과 깊은 인연을 지닌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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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선비의 숨결을 품은 함양 개평한옥마을 |
마을에는 오래된 한옥과 돌담길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 박제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오랜 생활의 흔적과 현재의 일상이 함께 이어지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인 셈이다.
해설사는 마을에 100년 이상 된 한옥이 약 60채 보존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정확한 건물 수는 조사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개평마을이 전통 한옥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종친들이 가장 관심 있게 둘러본 곳은 일두 정여창 고택이었다.
정여창은 1450년에 태어나 1504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다. 김굉필과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받으며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정여창의 사후에도 그를 기리는 가문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택의 주요 건물은 정여창이 생존하던 시기보다 후대에 건립되거나 중수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고택은 정여창이 직접 생활했던 당시의 건축물이 온전히 보존된 집이라기보다 그의 가문과 정신을 후손들이 계승해 온 역사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섯 개의 정려가 말해주는 충과 효의 가치
고택에 들어서면 눈길을 끄는 것이 웅장한 솟을대문과 그 위에 걸린 정려(旌閭)다.
정려는 국가가 충신과 효자, 열녀 등 모범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을 기리기 위해 내린 표창의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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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선비의 숨결을 품은 함양 개평한옥마을 |
오늘날의 훈장이나 국가 표창과 완전히 동일한 제도는 아니지만 국가가 도덕적 모범을 공인하고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설사는 일두 고택에 충신과 효자를 기리는 다섯 개의 정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 가문에서 여러 인물이 국가의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매우 큰 영예였다.
특히 조선은 충과 효를 국가와 가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윤리적 가치로 여겼다. 충은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효는 부모와 선조에 대한 공경을 상징했다.
이러한 가치가 모든 시대에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되새길 만하다.
산청 덕양전에서 선조에게 제향을 올린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에게 고택의 정려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선조를 공경하는 마음이 한 가문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의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솟을대문과 높은 기단, 건축에 새겨진 가문의 위상
일두 고택의 사랑채는 일반적인 민가와는 다른 웅장한 구조를 보여준다.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고 둥근 기둥과 처마를 받치는 활주를 사용하는 등 격식을 갖춘 건축적 요소가 눈에 띈다.
해설사는 일반 민가에서 보기 드문 높은 기단과 활주가 고택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기단은 건물을 지면보다 높게 올려 습기를 방지하고 건축물의 위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활주는 처마가 길게 뻗은 부분을 받쳐 주는 보조 기둥이다. 구조적인 기능과 함께 건물에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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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선비의 숨결을 품은 함양 개평한옥마을 |
사랑채에는 누마루도 마련되어 있다.
누마루는 바닥을 높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든 마루 공간으로 주변 경관을 감상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데 활용되었다.
조선의 양반가에서 사랑채는 단순히 남성들이 거주하는 방이 아니었다. 학문을 논하고 손님을 맞이하며 가문의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높은 기단과 넓은 마루, 아름답게 뻗은 처마에는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건축을 통해 격식과 품위를 표현하려 했던 당시의 문화가 담겨 있다.
사당과 곡간,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풍요의 공존
고택의 깊숙한 곳에는 선조를 모시는 사당이 자리한다.
해설사는 이곳이 불천위(不遷位) 제향과 관련된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불천위는 일반적인 제사의 대수 제한을 넘어 특별히 공덕이 높은 인물의 신위를 계속 모시도록 하는 제도다.
이는 한 인물의 학문적 성취와 사회적 공헌을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기리도록 하는 유교적 전통의 한 모습이다.
고택에는 여러 곳간도 남아 있다.
일반적인 물품을 보관하는 곳간과 곡식을 저장하는 곡간은 기능상 구별되며, 해설사는 특히 대규모 곡식 저장시설을 소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곡간이 한때 수천 석의 곡식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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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곡간의 위치와 높이였다.
해설사는 곡간이 사당보다 낮은 위치에 놓인 점을 들어 정신적 가치를 중시했던 유교사회의 공간적 위계를 설명했다.
다만 개별 건물의 높이와 배치에는 지형과 배수, 건축 시기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므로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당과 곡간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한 가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신적 전통과 물질적 기반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교적 생활철학의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오래된 집이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
개평한옥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종친들은 한옥의 건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삶의 질서와 선조들의 가치관을 함께 살펴보았다.
집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가족의 관계와 사회적 질서,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와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 가치가 담겨 있다.
오래된 사랑채와 안채, 사당과 곳간을 지나며 종친들이 만난 것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었다.
이번 탐방은 가락의 선조를 추모하는 제향에서 출발해 조선 선비들의 학문과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인문학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김종성 회장과 함께한 20여 명의 종친들은 늦가을의 정취 속에서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경험했다.
오래된 집 한 채가 수백 년의 역사를 말하고, 작은 건축 요소 하나가 한 시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는 오래되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릴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함양 개평한옥마을은 그렇게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에게 또 하나의 깊은 역사적 울림을 남겼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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