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집을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는가로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집의 크기 못지않게 자연과 어떻게 어울리고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락대전종친회 김종성 회장과 종친 30여 명이 산청 덕양전 추향대제를 마친 뒤 찾아간 함양 개평한옥마을은 이러한 한국 전통 주거문화의 지혜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을 안내한 박병호 문화관광해설사는 한옥의 담장과 마당, 마루와 창호, 굴뚝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건축 요소들에 담긴 의미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그 설명의 중심에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소통과 배려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였다.
낮은 담장은 단절이 아니라 소통의 공간이었다
해설사는 먼저 마을의 담장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은 외부의 침입을 막고 사적인 생활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돌을 쌓거나 흙을 다져 만들기도 하고 나무와 가시나무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전통마을의 담은 방어와 차단의 기능만을 수행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건네며 마을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담이 높으면 집 안의 사생활은 더 철저하게 보호할 수 있지만 바깥의 경치와 이웃의 모습도 함께 가려진다.
반대로 낮은 담은 일정한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연과 이웃을 향해 시선을 열어 둔다.
해설사는 이를 두고 우리 전통 담장의 중요한 정신을 소통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한국의 모든 담장이 낮았던 것은 아니다. 궁궐과 관아, 양반가의 담장은 용도와 지위에 따라 높이와 형태가 달랐다.
그럼에도 개평마을의 돌담길은 담장이 반드시 사람과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는 장벽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꽃담 역시 주목할 만하다.
꽃담은 벽돌과 기와 등을 이용해 꽃과 문자, 길상무늬를 표현한 담장이다. 단순한 경계시설에 아름다움과 상징성을 더한 것이다.
담장 하나에도 실용성과 미적 감각을 함께 담아냈던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헛담과 내외담, 서로를 존중하기 위한 거리
일두 고택 안으로 들어서면 공간을 구분하는 여러 형태의 담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해설사가 소개한 것이 헛담과 내외담이다.
헛담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시선을 적절하게 가리거나 동선을 조절하는 데 활용된 담이다.
내외담은 전통적인 남녀 생활공간을 구분하는 역할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남성의 생활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구분은 당시 유교적 사회질서와 남녀의 역할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의 평등한 생활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건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사적인 공간을 보호하고 외부인의 시선을 조절하려는 배려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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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개평한옥마을에서 만난 한국 전통 건축의 지혜 |
해설사는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바깥의 움직임을 살피면서도 외부에서는 안쪽 생활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담을 배치한 사례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현대의 주거공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생활 보호와 동선 설계의 지혜가 담겨 있다.
사람 사이에는 가까움도 필요하지만 적절한 거리도 필요하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할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오히려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옛 담장은 오늘날에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는 마당의 철학
한옥의 또 다른 특징은 마당이다.
오늘날 주택에서는 마당을 정원으로 꾸미거나 잔디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통 한옥의 마당은 단순한 조경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활동이 이루어지는 실용적인 장소였다.
가을에는 곡식을 말리고 추수한 농산물을 정리하는 공간이 되었다.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잔치마당이 되었고 명절에는 가족과 이웃이 함께 어울리는 놀이마당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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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개평한옥마을에서 만난 한국 전통 건축의 지혜 |
해설사는 이를 두고 마당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 채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마당의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정과 물건, 정보와 욕망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들어설 공간을 찾기 어렵다.
때로는 비워 두는 일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된다.
한옥의 마당은 그 사실을 공간으로 보여준다.
북방의 온돌과 남방의 마루가 만난 한옥
해설사는 한옥의 독특한 구조를 설명하면서 온돌과 마루의 조화를 강조했다.
온돌은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을 방바닥 아래의 고래로 통과시켜 실내를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 방식이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발달한 한국 전통 주거문화의 대표적인 기술이다.
반면 마루는 바닥을 지면에서 띄우고 나무로 만들어 공기가 통하도록 한 공간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에 통풍을 돕고 쾌적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한옥은 이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주거공간 안에 결합했다.
겨울에는 온돌방에서 따뜻하게 생활하고 여름에는 바람이 통하는 마루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해설사는 이를 북방의 난방문화와 남방의 마루문화가 조화를 이룬 결과로 설명했다.
한옥의 마루에는 대청마루와 툇마루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대청마루는 집 안의 주요 공간을 연결하면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툇마루는 방 바깥쪽에 설치되어 이동과 휴식을 돕는 공간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고 벗거나 바깥일을 마친 뒤 잠시 쉬어 갈 수도 있었다.
마루는 단순한 건축 구조물이 아니라 실내와 실외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완충공간이었다.
작은 창 하나에도 담긴 생활의 지혜
한옥의 창호 역시 흥미로운 설명거리였다.
해설사는 바라지창과 들창, 봉창 등 다양한 창의 형태를 소개했다.
바라지창은 통풍과 채광을 돕는 창의 한 종류이며 들창은 위로 들어 올려 열 수 있도록 만든 창이다.
봉창은 일반적인 여닫이창과 달리 작은 구멍 형태로 만들어 빛이나 공기가 들어오도록 한 창을 가리킨다.
한옥에서는 창과 문의 기능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필요에 따라 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문짝을 들어 올려 실내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한정된 공간을 계절과 생활방식에 맞게 유연하게 사용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굴뚝에도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해설사는 산간지역과 남부지역의 굴뚝 높이와 위치가 서로 달랐던 사례를 소개했다.
굴뚝의 높이와 형태는 연기의 배출과 난방 효율에 영향을 주며 실제 구조는 기후와 지형, 건물의 규모와 온돌 구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한옥은 획일적인 설계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 지역의 환경과 사람들의 생활에 맞추어 변화해 온 건축문화였다.
서로를 덜 간섭하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지혜
해설사의 설명 가운데 종친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대목은 가족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택의 안채와 중문, 생활공간을 설명하던 그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집 안의 문과 잠금장치가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가족 구성원 사이의 사생활과 간섭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오늘날 자신도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부모는 자녀보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많은 조언을 해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때로는 보아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가족의 화목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해설사의 이러한 이야기는 한옥의 건축 구조를 넘어 오늘날 가족관계에 대한 생활의 지혜로 이어졌다.
서로 가까이 살아도 모든 것을 간섭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지키는 태도는 현대사회에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한옥이 가르쳐 주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은 오래된 돌담길과 고택의 마당을 거닐며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생활철학을 살펴보았다.
낮은 담장은 이웃과의 소통을 이야기했고 비어 있는 마당은 여유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루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했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은 가족 구성원 사이의 거리와 배려를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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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개평한옥마을에서 만난 한국 전통 건축의 지혜 |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집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 넓은 집과 더 높은 담장, 더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더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좋은 집은 크고 화려한 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가족이 서로를 존중하며 이웃과 따뜻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공간일 것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기와와 기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마음은 열어 두었던 삶의 지혜에 있다.
늦가을 함양 개평한옥마을에서 가락대전종친회 종친들이 만난 것은 오래된 집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소통과 배려의 철학이었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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