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발단
1919년 11월 결행된 의친왕 이강(李堈)의 상하이 망명 시도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의 제2차 독립선언은 3·1운동 직후 일제가 구축한 식민지 지배 체제의 정당성에 균열을 가한 사건이었다 . 그러나 대중 역사 콘텐츠인 ‘박종인의 땅의 역사’(273화.221화) 에서는 의친왕의 대동단 독립선언서 서명과 평민 신분 선언 담론을 ‘사후에 날조된 허구’ 내지 ‘기획된 신화’로 단정하며 역사적 실체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
박종인 측이 제기하는 조작설의 논거는 크게 세 가지 사료적 정황으로 집약된다 .
첫째, 현재 전해지는 대동단 독립선언서에 표기된 ‘이강’ 명의는 자필 서명이 아닌 강필등사본(등사판 인쇄본)에 불과하며, 문건에 쓰인 맞춤법(‘뿐’ 등의 철자)이 193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언문철자법 제정 이후의 형태를 띠고 있어 사후 제작된 위작이라는 점이다 .
둘째, 망명 실패 후 총독관저에서 모리 로쿠지(森六治) 경부에게 심문을 받은 의친왕의 신문조서에서 의친왕 본인이 망명 의사 및 독립선언서 서명을 완강히 부인하고 대동단원들이 명의를 도용했다고 진술했으므로 거사의 자발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
셋째, 따라서 "일본 황족의 특권을 버리고 자유 대한의 평민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서사는 실체가 없는 조작이라는 결론이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 사법 체계 하에서 작성된 관헌 사료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피상적 텍스트 독해이며, 1919년 11월 당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에 공포된 '의친왕 친서'와 서울 도심에 살포된 '대동단 독립선언서'라는 두 문건의 서지적 성격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역사 왜곡이다 .
독립운동 문건의 계통 분리와 평민 선언의 원전 규명
박종인의 비판이 드러내는 가장 근본적인 학술적 결함은 1919년 11월에 생성된 두 개의 상이한 1차 사료를 단일 문건으로 착오한 데 있다. "자유 한국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지 않겠다"는 발언은 서울에서 살포된 〈대동단 독립선언서〉가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발표된 〈의친왕 친서〉에 수록된 문헌이다 .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 제1면에 보도된 〈의친왕의 친서〉는 의친왕이 상하이 망명을 결행하면서 임시정부 수뇌부에 전달하고자 한 정치적 성명서였다 . 해당 문건 제4항에는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 임시정부가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에 노력하겠다"는 결의가 명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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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교차하던 독립운동사에서 중대한 사상적 전환을 보여준다. 당시 수립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 황실 인사의 망명은 자칫 군주제 부활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 1920년 1월 8일 자 《독립신문》 논설 〈의친왕과 임시정부〉에서 여운형 등이 밝힌 바와 같이, 임시정부는 구 황족을 봉건적 군주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일 공민(公民)"으로서 환영하겠다는 원칙을 확립하고 있었다 . 의친왕 역시 이에 조응하여 자신의 신분을 군주나 특권 계급이 아닌 '평민(공민)'으로 규정하고 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 박종인이 "의친왕이 평민으로 독립선언을 했다는 것은 거짓"이라며 조롱한 것은, 이 친서 사료의 존재를 도외시한 채 대동단 선언서의 문맥에만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발생한 치명적인 학술적 착오다 .
한편 1919년 11월 28일 서울 도심에 살포된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는 나창헌이 기초하고 의친왕 이강, 김가진, 전협, 여성 대표 이신애 등 33인의 명의로 공포된 대중 행동 격문이었다 . 박종인은 해당 선언서에 자필 서명이 없다는 점을 들어 위작의 증거로 삼았으나, 이는 지하신문과 격문의 인쇄 유통 방식을 완전히 간과한 주장이다 . 1919년의 3·1 독립선언서 또한 보성사에서 인쇄된 활판 인쇄물에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인쇄되었을 뿐 대표자 각자의 친필 서명이 날인된 것이 아니었다 . 대동단 선언서 역시 가두 시위 도중 신속하게 다량 살포하기 위해 등사판으로 제작된 문건이었다 .
현전하는 등사본에서 확인되는 1930년대식 맞춤법 표기는 1919년 원본이 훼손되거나 일제에 압수된 이후, 대동단 관계자들이나 후대 독립운동 조직이 기념 및 선전 목적으로 필사·재간(전사)하는 과정에서 후대 정서법이 개입된 이본(異本)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 사료학에서 텍스트의 후대 전사본에 맞춤법 변화가 나타난다고 하여 그 사건 자체를 사후 조작으로 모는 것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1919년 11월 28일 당일 이신애, 정규식, 박정선 등 대동단원들이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자동차를 몰며 이 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20년 12월 7일)에 확정된 실체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
안동현 탈출 거사의 실행 과정과 자발성의 사료적 실증
박종인 측은 의친왕이 대동단원들에게 협박을 받아 강제로 끌려갔거나 무단 납치된 것에 불과하다는 일제 신문조서의 일방적 문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 그러나 탈출의 전 과정과 사전 준비, 동선 및 물적 증거를 교차 분석하면 의친왕의 자발적 결단과 능동적 공모 정황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
대동단은 1919년 3월 일진회 출신 전협과 최익환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로,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통해 전국적 독립전쟁을 도모하였다 . 대동단은 거사의 파급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 황실의 중심인물이자 지속적으로 반일적 성향을 표출해 온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시키기로 결의하였다 . 이 계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하에 추진되었으며, 임시정부 특파원 강석룡이 국내에 잠입하여 대동단 지도부와 망명 일정을 조율하였다 . 의친왕과의 내통 및 설득은 의친왕비(연원군부인 김씨)의 친남동생인 김춘기가 사동궁을 출입하며 전담하였다 . 이미 1919년 10월 대동단 총재이자 구 대한제국 대신인 김가진이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안착한 상태였으므로, 의친왕에게 상하이 망명은 충분히 구체화된 선택지였다 .
1919년 11월 9일 밤, 의친왕은 감시망을 뚫기 위해 양복이나 관복이 아닌 평민 차림으로 변복하고 은밀히 사동궁을 빠져나왔다 . 이어 자하문 밖 세검정을 거쳐 수색역 인근의 안전가옥에 은신하였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결정적 사료는 수색역 출발 직전 의친왕이 보인 행동이다 . 의친왕은 대동단 안내자들에게 측실인 수인당 김흥인과 간호사 최효신을 반드시 동행시켜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 그 이유는 고종이 생전에 상하이 덕화은행(Deutsch-Asiatische Bank) 등에 예치해 둔 내탕금 150만 원의 예금 증서를 이들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거액의 자금 증서를 챙겨 상하이로 가져가려 했다는 사실은 망명 이후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군자금을 조달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사전에 확립되어 있었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
이동 경로의 물리적 현실 또한 피랍설을 완전히 논파한다. 의친왕 일행은 11월 10일 오전 수색역에서 경의선 기차에 탑승하여 평양역을 거쳤으며, 다시 국경 열차로 갈아타 압록강 철교를 통과한 뒤 11월 11일 중국 관할인 안동현(현 단둥) 역에 도달하였다 . 만약 의친왕이 대동단원들의 협박에 못 이겨 끌려간 것이라면, 삼엄한 경비 태세가 유지되던 서울 시내와 주요 역, 특히 수많은 일본 헌병과 철도경찰이 상주하던 평양역에서 구원을 요청할 기회가 얼마든지 존재하였다. 의친왕이 일경의 추적망을 따돌리고 국경을 넘어 안동현 역까지 진출한 것은 본인의 주체적 의지와 결단이 작동했음을 웅변한다 . 그러나 안동현 역에서 대기 중이던 임시정부 연락망과의 합류를 목전에 두고, 사전 첩보를 입수하고 잠복해 있던 평안북도 경찰부 소속 고등계 형사들에게 발각됨으로써 망명은 아쉽게 좌절되었다 .
식민지 사법 사료의 비판적 독해와 일제의 정치적 은폐
박종인이 '의친왕 조작론'의 핵심 증거로 원용하는 것은 체포 후 작성된 총독부 경무국 신문조서다 . 해당 조서에서 의친왕은 "선언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 "김춘기가 강석룡의 명의 도용 사실을 알리기에 괘씸하여 질책했다", "귀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기회를 엿보아 돌아오려 안동현까지 갔다"며 철저히 혐의를 부인하고 단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진술을 남겼다 .
그러나 근대 역사학의 기본 방법론인 사료 비판(Source Criticism)에 입각할 때, 식민 권력의 강압적 수사 환경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를 문자 그대로의 객관적 진실로 신뢰하는 것은 기초적인 오류다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재판 기록에서 피체된 독립운동가들이 조직을 보호하거나 가혹한 형벌을 면하기 위해 법정이나 경찰 신문에서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강요를 받았다"거나 "도장을 도용당했다"고 위장 진술한 사례는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당시 의친왕은 대한제국 황실의 공족(이강 공)으로서 일본 황실령과 제국 형법의 적용을 받는 특수 지위였다 . 만약 임시정부 망명과 독립선언 동참을 시인할 경우, 일본 제국에 대한 '대역죄(大逆罪)' 및 내란죄가 성립하여 작위 박탈은 물론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며 왕실 전체가 풍비박산 날 위기였다 . 따라서 의친왕이 신문 과정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은 왕실의 존속과 개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형적이고 필연적인 사법적 자기방어 진술로 평가해야 한다 .
역설적으로 일제 총독부 당국의 비공개 사건 처리와 사후 탄압 양태는 의친왕의 혐의가 실재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 만약 의친왕이 순수한 납치 피해자였다면 총독부는 대동단을 파렴치한 황족 유괴 범죄 집단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의친왕의 결백을 공포하여 황실의 충성도를 과시하는 체제 선전에 활용했어야 마땅하다 . 그러나 일제는 사건 직후 극단적인 보도 통제를 시행하였으며, 내외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는 데 급급하였다 . 일본 황족의 대우를 받던 공족이 독립운동 진영의 임시정부로 탈출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의 ‘일선동조론’과 식민 지배의 허구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정치적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일제는 의친왕을 법정에 세워 기소할 경우 발생할 국내외의 엄청난 파장을 두려워하여 형사 처벌을 단행하지 못하고 불기소 처리하였다 . 대신 사동궁을 경기도 경찰부의 24시간 삼엄한 밀착 감시망 아래 두었으며, 외부 인사의 출입을 전면 봉쇄하였다 . 나아가 통감부 관저였던 남산 녹천정(綠泉亭)으로 강제 이궁 조치하여 사실상의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하게 하였다 .
반면 체포된 대동단 지도부에 대해서는 가혹한 보복 판결을 내렸다 .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선고된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주모자 전협에게 징역 8년, 최익환에게 징역 6년, 정남용에게 징역 5년 등 중형을 언도하였으며, 판결 이유에서 "이강 공을 상해로 탈출시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을 범죄 사실의 핵심으로 명시하였다 . 사법 판결문 자체가 이 망명 사건이 조작된 허구가 아닌 실재한 항일 거사였음을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
근현대사 학계의 실증 연구와 의친왕 망명 거사의 역사적 위상
한국 근현대사 학계는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의 저작 《대동단실기》(1982)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장석흥 교수의 연구 논문 〈조선민족대동단연구〉(1989) 등을 통해 대동단과 의친왕 망명 사건의 전말을 사료 비판적으로 완벽히 정립하였다 .
학계의 연구 성과가 확립한 의친왕 망명 거사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봉건적 군주제에서 근대적 민주공화제로 나아가는 체제 전환기의 상징적 사건이다 . 대동단은 구 왕실의 상징성을 활용하여 보수적 유림과 대중을 규합하려 했으나, 의친왕이 향하고자 한 곳은 군주제 복벽 정부가 아니라 국민주권을 선포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 의친왕이 《독립신문》 친서를 통해 "평민이 될지언정 황족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구 체제의 황족이 특권을 자진 철폐하고 공화국의 자유 시민(공민)으로 합류하겠다는 역사적 결단을 내포한다 .
둘째, 의친왕의 생애와 행적을 둘러싼 공과의 입체적 이해다. 의친왕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공족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고 관변 행사에 참석하는 등 식민 지배 체제의 틀 속에서 타협하며 생활했던 명백한 한계와 오점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의 열기 속에서 그는 목숨을 걸고 탈출을 결행하여 제국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섰으며, 망명 실패 이후 일제의 집요한 도일(渡日)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소극적 저항과 불복종으로 맞섰다 .
셋째, 사료 오독에 기인한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경계다. 후대 기념사업회나 대중 매체가 등사본 유인물을 친필 원본으로 과장하거나 의친왕을 무결한 혁명 영웅으로 낭만화하는 상업적 탈색은 학술적으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 그러나 그러한 대중적 과장이나 전사본의 서지학적 문제를 빌미 삼아, 안동현 탈출이라는 엄연한 실천적 거사와 《독립신문》 친서의 뚜렷한 사료적 증거까지 "전부 날조된 쇼"로 매도하는 박종인 식의 주장은 식민지 지배자의 편향된 수사 기록에만 매몰된 천박한 역사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
결론: 사료적 진실과 역사 왜곡에 대한 학술적 총평
박종인이 유포한 ‘의친왕 대동단 조작설’은 1차 사료의 갈래를 파악하지 못한 무지와 식민지 사법 조서의 편향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서 기인한 명백한 오류다 . 의친왕이 언급한 "평민 선언"은 대동단 선언서의 자구가 아니라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 제1면에 명백히 인쇄 보도된 〈의친왕 친서〉의 역사적 기록이며 , 11월 28일 자 대동단 선언서는 수많은 단원들이 피 흘리며 현장에서 배포한 실체적 격문이었다 .
또한 압록강을 넘어 안동현 역까지 도달한 탈출의 궤적과 내탕금 예금 증서 지참이라는 구체적 행동은 자발적 망명 의사를 확증하며, 체포 직후 작성된 신문조서의 부인 진술은 가혹한 식민지 법정에서 왕실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권 행사에 불과하다 . 일제가 의친왕을 기소하지 못하고 가택 연금에 처한 것과 대동단 지도부에 중형을 선고한 사법 기록 자체가 이 거사의 진실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
의친왕 이강의 안동현 망명 거사는 비록 일제의 경계망에 걸려 미수로 끝났으나, 망국의 황족이 제국주의의 안락한 특권을 거부하고 민주공화정의 한 평민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실존적 항일 투쟁의 역사적 실사(實史)로 평가되어야 한다 . 사료의 맥락을 거세하고 식민 통치자의 시각을 맹종하여 역사적 진실을 조작으로 치부하는 반지성적 주장은 학술적으로 준엄하게 배격되어야 한다 .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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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