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지금 역사상 가장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빠르게 확장하며 산업과 경제와 의료와 교육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위험이 함께 자라고 있다.
지난 11월 2일 보도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급 경보 시스템 해킹 사건은 이러한 시대적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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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가 만들어낸 거짓 경보가 전쟁을 부르는 시대, AI 작성 이미지 |
전쟁 중인 두 나라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핵 공격이 임박했다는 허위 경보가 발송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핵 공격과 미사일 발사에 관한 거짓 경고가 전달됐고 러시아에서는 핵 공격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라는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다행히 실제 핵 공격은 없었다. 양국 당국은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허위 경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격의 배후와 두 사건의 연관성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만약 이러한 허위 경보가 일반 국민을 넘어 군사 지휘체계나 국가 지도자의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누군가 조작한 정보가 실제 군사적 대응을 촉발하고 그것이 다시 상대국의 보복으로 이어진다면 인류는 단 한 발의 실제 공격 없이도 전쟁의 문턱에 도달할 수 있다.
이번 해킹 사건에 AI가 사용됐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AI가 사이버 공격과 허위정보의 제작 및 확산을 더욱 정교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다가올 위험을 예고하는 경고음이다.
상극의 경쟁이 기술을 지배하는 시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위험을 인류가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스스로 제어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오늘날 AI 개발을 둘러싼 국가와 기업의 경쟁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경제적 패권과 군사적 우위를 결정하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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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가 만들어낸 거짓 경보가 전쟁을 부르는 시대, AI 작성 이미지 |
한 기업이 더욱 강력한 AI를 개발하면 경쟁 기업은 그보다 뛰어난 기술을 내놓으려 한다. 한 국가가 AI를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상대 국가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강력한 기술을 확보하려 한다.
문제는 이 경쟁에 스스로 멈추는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개발을 멈추지 못한다. 상대가 먼저 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불안이 자신의 무기 개발을 정당화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무기는 다시 상대방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것이 바로 상극의 질서가 만들어내는 악순환이다.
과거에는 인간이 직접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던 많은 과정이 이제는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해 처리된다. 앞으로 AI가 군사정보 분석과 사이버 방어와 무인무기 운용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면 잘못된 정보 하나가 국가 간 긴장을 급격하게 증폭시킬 가능성도 커진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판단과 통제 능력을 앞지르는 순간 문명의 편리함은 문명의 위협으로 바뀔 수 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지는 문명
AI 시대의 또 다른 위기는 인간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사진과 영상과 음성이 중요한 증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실제 인물이 말하지 않은 내용을 마치 그 사람이 직접 말한 것처럼 만들어낼 수 있고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을 실제 현장의 영상처럼 재현할 수도 있다.
국가 지도자의 가짜 전쟁 선포 영상이 유포되고 군사적 공격이 시작됐다는 허위정보가 확산되며 금융시장의 붕괴나 대규모 재난을 알리는 거짓 경보가 동시에 전달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정보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순식간에 퍼진다면 국민의 혼란과 공포는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못지않게 커질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짜 위험이 발생했을 때조차 사람들이 경보를 믿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
거짓 경보가 반복되면 경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결국 실제 재난 앞에서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정보의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인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AI를 얼마나 빠르게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 기술을 어떻게 통제하고 어떤 가치 아래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선 국가 차원에서는 AI와 사이버 기술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영역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강력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핵무기와 전략무기의 사용 결정에는 인간의 실질적인 통제와 검증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단일 경보나 AI의 판단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군사적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다중 검증체계와 국가 간 긴급 소통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국제사회 역시 AI를 이용한 공격과 허위정보 조작을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닌 인류 공동의 안전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핵무기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국제적 협약과 감시체계를 발전시켜 왔듯이 AI의 군사적 오용과 핵심 기반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국제 규범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의 책임도 중요하다. AI 개발의 목적이 시장 선점과 수익 창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위험을 사전에 평가하고 안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도와 기술적 장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 역시 새로운 문명에 걸맞은 정보 판단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충격적인 뉴스나 긴급 경보를 접했을 때 즉시 확산하기보다 공식 발표와 복수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을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동시에 통신 장애와 사이버 공격 등 비상상황에 대비한 기본적인 생활 안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가족 간 비상 연락 방법을 정하고 공식 재난 안내를 확인할 수 있는 복수의 수단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것은 막연한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다.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인간 스스로의 판단 능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극의 문명을 넘어 상생의 문명으로
우리는 여기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은 왜 이렇게 놀라운 기술을 발전시키면서도 그 기술을 서로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하는가?
과학기술의 발전 자체가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욱 강력해진 기술은 더욱 거대한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문명은 경쟁과 대립을 중요한 동력으로 삼아왔다.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 간 시장 경쟁은 수많은 혁신을 이루어냈지만 동시에 전쟁과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을 낳기도 했다.
AI 시대에는 이러한 상극적 경쟁의 부작용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제는 경쟁의 승리만을 문명의 발전으로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방을 제압하는 능력보다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능력이 중요하고 기술을 독점하는 힘보다 기술의 혜택과 책임을 함께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생의 정신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상생은 단순히 서로 잘 지내자는 도덕적 구호가 아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현대 문명에서 상대방의 파괴가 결국 자신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공동의 생존을 위한 질서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원리다.
한 국가의 사이버 시스템이 무너지면 그 영향은 국경을 넘어 확산될 수 있다. 어느 한 나라에서 시작된 군사적 오판은 전 세계의 평화와 경제와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이처럼 운명을 함께하는 시대에 인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문명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문명이어야 한다.
AI보다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한 시대
AI는 인간보다 빠르게 계산하고 방대한 정보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일인지 그리고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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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가 만들어낸 거짓 경보가 전쟁을 부르는 시대, AI 작성 이미지 |
기계의 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에게는 더욱 깊은 성찰과 윤리적 책임이 요구된다.
앞으로의 교육 역시 지식의 습득과 기술의 활용을 넘어 생명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책임 그리고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길러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가 AI 시대에 진정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일만이 아니다. 그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을 함께 성장시키는 일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이번 허위 핵 공격 경보는 다행히 실제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인류가 기술의 발전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통제할 윤리와 국제적 협력체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작은 정보 조작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AI를 인간의 욕망과 대립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도구로 발전시킬 것인가.
그 선택은 AI가 아니라 인간에게 달려 있다.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는 문명의 희망
오래전 한국을 찾은 한 미국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2005년 당시 한양대학교에서 영어교육학 강사로 활동하던 팀 버드송은 대학의 건학이념을 살펴보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뜻을 접했다.
그는 이 말에 감명을 받아 매일 아침 캠퍼스에 버려진 쓰레기와 담배꽁초를 줍기 시작했다. 거창한 강연이나 구호가 아니라 허리를 굽혀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작은 행동으로 자신이 이해한 홍익인간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학생들도 하나둘 쓰레기 줍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소박하지만 결코 작지 않다.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힘은 반드시 거대한 기술이나 강력한 권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과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작은 행동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전해온 홍익인간의 정신 역시 이러한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기술이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시대에 정작 필요한 것은 인간이 기술보다 더 지혜로워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결국 나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에서 출발할 것이다.
상극의 경쟁을 넘어 상생의 협력으로 나아가는 길. 어쩌면 인류가 찾고 있는 새로운 문명의 희망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충분히 실천하지 못했던 그 소박한 정신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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