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600만 교도, 상징적 숫자인가?
접지리 뿐만 아니었다.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민중들의 ‘입교 권유에 노력한 결과’ 놀랄만한 다수의 교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자칭·타칭 600만 교인’으로 기록될 정도로 보천교는 한때 급성장했던 것이다. 물론 자칭은 교단 내의 주장이고 타칭은 조선총독부 등 교단 외의 발표였다. 당시 조선 내의 전체 인구가 1925년 기준 1,900만 명 정도였으니 600만 명 정도면 조선 민중의 1/3이 믿었다고 볼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600만 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숫자가 너무 커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때문에 보천교에 대해 언급하거나, 관련 학술대회를 할 때마다 소위 ‘600만 교도’에 대한 질의는 단골로 등장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아예 상징적인 의미로 취급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근 국회서 열린 보천교 관련 학술대회에서도 ‘상징적 숫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실제적인 숫자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를 지닌 숫자로 봐야 할 것인가. 이를 상징적 의미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보천교 교도의 실제 숫자를 50만 명, 150만 명, 200만 명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한다. 사실 이 추정치 역시 적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런 추정치 계산의 근거가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정확한 종교인구 수를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그 숫자를 추정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허구적인 상징이라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필자는 ‘600만 명’을 실제적 숫자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러한 숫자를 고려할 때,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600만 명이라는 기록이 어디에서 제시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물론 교단 내의 기록(『보천교연혁사』, 『도훈』, 『보광』 등)에서 그러한 주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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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교 일반의 표지 |
1925년 보천교의 남·북선(南北鮮) 대회에서도 ‘우리 600만 교인’이라는 표현이 단골로 등장했다. 그러나 식민권력의 보고서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전라북도 경찰부에서 비밀리에 작성한 보고서인 『보천교일반』은 보천교가 ‘교의와 내부조직 등을 정비하고 포교에 노력한 결과 일시 교도 600만이라 호언할 정도의 세력(勢力)’을 지닌 교단으로 성장했다고 기록했고, 『양촌 및 외인사정 일람』에서도 ‘전북 정읍군 입암면의 차경석이 대통(大統)을 전수받아 일의포교(一意布敎)에 노력하고 교무를 분장하여 24인의 임직을 두고 기미년 10월에는 다시 60방위제를 정해 금일에 이르러서는 교도 600만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당시 언론들도 ‘보천교 교도 600만 명’으로 대수롭지 않게 기록하고 있었다(예. 신한민보 1927.6.23.).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미국 총영사관의 밀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정보보고서에도 동일한 숫자가 기록되었다. 물론 이는 “It is said to number more 6,000,000 members.”라 하여 간접 인용으로 되어 있다. 당연히 일제 식민권력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교단 기록은 그렇다 하더라도, 식민권력의 보고서들이 줄줄이 ‘600만 명’으로 기록한 것이다. 보통이라면 숫자를 축소해 기록하는 것이 상식적인 관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어찌 해석해야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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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방주 조직도 |
다음으로 ‘600만 명’이라는 숫자가 근거를 갖고 추계(推計)된 수(數)라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곧 당시 보천교의 60방주 조직은 간부가 557,700명으로 구성되었다. 교주 차월곡을 정점으로 그 밑에 육임-십이임-팔임-십오임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간부들을 모두 합하면 이 정도의 수가 되는 것이다. 이 간부들이 각 10명 정도를 포교했다고 한다면 보천교의 전체 교인 수가 600만 명에 근접한다. 실제로 보천교에서 팔임이 되기 위해서는 40명을 모집해야만 했었고, 간부는 100명을 포교해야만 직책이 주어졌다고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600만 명은 그저 수가 많다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당시 경북경찰부가 발간한 『고등경찰요사』(1934.3.25)의 교세 현황을 보면, 경북도내 종교인 중 47% 정도가 보천교인이었고, 70% 정도가 증산계(보천교+무극대도교)였다. ‘주요 요주의 유사단체’로서 보천교는 성금액수도 매우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상당한 교세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600만 명’이라는 숫자에 의혹을 떨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좋을 듯하다.
먼저 당시 민중들은 동학(천도교)이나 불교 등을 보천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보천교의 주문에는 동학 주문인 시천주주(侍天主呪) 등이 들어있고, 당시 천도교인들도 ‘천도교도가 되면 장래 조선독립에 즈음하여 물질적 이익을 얻는다.’고 믿어 입교한 자들이 있었다. 민중들은 천도교인지 동학인지 보천교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불교나 타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김형렬이 위봉사에서 활동했던 경우처럼 보천교도와 불교도가 구분되지 않았고, 심지어 기독교인이면서 보천교 활동을 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다음 사실과도 연결된다. 곧 일제강점기에 ‘소속’만을 기준으로 종교 인구를 추계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어느 ‘한 종교만을 신앙’해야 되고, 더욱이 ‘하나의 종교교단에만 소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서구적인 시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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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안에 있는 석축. 보천교 본소 시절 석축의 흔적이 아직도 역사를 머금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
민중들은 어떤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것이 방향을 찾아 헤매는 자신에게 심리적 위안을 주고 민족독립에의 열망을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는 종교사회학에서 ‘소속되지 않은 믿음’(Believing without Belonging)이라는 테제로 설명한다. 더욱이 민족종교들의 포교는 대부분 개인적 연결 관계인 연원제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600만 명도 충분히 가능한 숫자가 아닐까.
‘자칭·타칭 600만 교도’, 그게 만약 기독교나 불교라도 그렇게 쉽게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었을까? 소위 ‘보천교는 유사종교’이기 때문에, 그래서 600만이라는 숫자는 설마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어있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자문해 본다.
보다 적극적이고 열린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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