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 않고 살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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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삶은 소통이다....없-음들만 있-으니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외적, 내적 힘들이 갑돌이의 입을 막을 때, 갑돌이는 말을 못한다.
갑돌이 자신이 어휘와 개념이 달리고, 생각을 말로 잘 정리할 줄 모르거나, 상대가 나의 위이라서, 아니면, 나와 달라서 혹은 수줍게 만드는 환경에서 그의 말이 입 밖으로 못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돌이 안팎에서 말길을 막는 정신적 물질적 힘들, 혹은 이 말길을 막고 트는 물질적 정신적 문(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위와 아래 사이’ 그리고 ‘같음과 다름 사이’에 난 벽과 문의 논리라 할 것이다.
소통이 안 될 때,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 사랑하지만 함께 살지 못하거나, 함께 살아도 그 함께의 크기는 크게 작아질 것이다.
아버지의 꾸중에 해명하려할 때, ‘어디다 대고 말대답이냐?’ 혹은 ‘버릇없다!’는 큰소리를 듣는다.
아버지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혹은 아버지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의 방식에-만 근거하여 아버지가 큰소리를 낼 때, 갑돌이의 목소리는 그만큼 작아진다. 혹은 기어 나오지도 못한다.
옷감을 홀로 재고 마르는 독재(獨裁)는 독재자 ‘밖’의 사람들이나 독재자 ‘아래’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못한다고 여기거나 안 하기를 바라는 것을 포함한다. 밖은 다름을, 아래는 약함을 가리킨다. 같음, 강함이 다름, 약함을 밖으로 밀어-내거나 아래로 눌러-내려 ‘강-같음’의 ‘홀로-함’ 혹은 강-같음의 ‘홀로-임’이 독재가 아닐까?
다름은 약함이기 쉽고 약함은 다름이기 쉽다. 독재는 힘 있는 나와 같아지라는 것이다. 이는 나의 힘을 함께 나누는 같아짐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힘을 나 홀로 행사함에 동의하는 같아짐이다.
다름을 계속 다르게 만드는 같음이랄까? 같음과 다름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4장에서 이들을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구분할 것이다.
다양한 종류와 방식들의 ‘생각 독재’나 ‘말 독재’ 속에 많은 사람들의 사람크기, 행동크기는 쉽게 작아진다.
이는 갑돌이와 갑돌이 아버지 사이에서만의 소통방식, 아니, 불통방식이 아니다. 영화 <도가니>에서도, 학교나 유치원, 교회나 군대에서도, 국회나 가정, 일터에서도 그 강도나 색깔, 방식은 달라도, 이성보다는 힘으로, 쌍방(雙方)이나 다방(多方) 혹은 조금은 난방(亂方)이기보다는 일사(一絲)도 불란(不亂)한 일방(一方)으로 밀고나가는 이런 수직주의적 갑질 문화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우리들의 함께 크기나 사람크기를 크게 작게 한다.
갑돌이가 겨우 입 밖으로 말을 냈어도 갑순이가 알아듣지 못하면 역시 문제다.
관심이 없어서, 어휘력이 약해서, 집중을 못해서, 무시해서, 무서워서, 싫어서, 이해력이 약해서, 부끄러워서, 피곤해서, 거리가 멀거나 경적 소리가 시끄러워서, TV를 보거나 파리를 잡는 중이라서 갑순이는 갑돌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이때, 상대가 갑돌이의 아버지라면, 아마 권위의식이나 생각과 가치의 차이가 불통의 더 큰 원인이 될 것이다.
말이 못 나가고, 나가도 못 듣고, 들어도 대답을 못하고, 대답이 없어도 되물을 수 없다면 말길이 막힌 것이다. 입과 귀가 의학적으로는 ‘정상’이지만, 말 못하고 말 못 듣는 사회가 소통크기가 작은 세상크기 아닌가?
외적으로는 시끄럽고 눈부시며 쫓고 쫓기는 경쟁 속에서 쓸데없이 신경 쓰고 손발 써야 하는 일들이 넘쳐난다. 내적으로는 안 들어도 말하려 하고, 말해도 안 들으려 함이 심하다. 말 못하는 벙어리와 말 못 듣는 귀머거리들이 ‘정상적으로’ 만나 소통 아닌 소통을 하는 모습들과 이들의 원인이나 결과들을 끊임없이 묻고 밝히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소통의 하드웨어인 교통과 통신의 매체는 급성장했지만, 빨라지고 각박해지는 긴장과 예각의 삶 속에 사람 사이에 난 말길의 크기는 오히려 퇴보한다. 퇴보까지는 아닐지라도, 우리사회의 말길 크기는 역시 좁고 짧다. 대화는 적고 일방적이며 그나마 자주 끊긴다.
쉴러(Schiller, 1759~1805)는 사람들이 ‘차례로 말을 하지, 아무도 함께 말하지 않는다’면서, ‘누가 두 독백들을 대화라고 하느냐?’고 묻는다. 집안에서는 ‘밥 먹자! 자자!’가 독백 같은 대화의 다라고들 한다.
상대에 대한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어도 시간이나 힘이 없다. 말할 줄은 모르고 들을 줄은 더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하는 말, 듣는 말이 없게 되며, 보는 눈, 잡는 손, 안는 팔, 얹는 다리가 없게 된다. 삶의 크기, 행복크기는 소통크기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 없-음들만 있-으니...
SNS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만나기도 하지만, 더 떨어지기도 한다. 이는 끼리끼리만, 온라인에서만 그리하여 직접적이고 다양한 만남들을 포기하면서만 가능한 만남이 아니던가?
빠르고 간편하고 효율적인 면도 있지만, 서로 보고 잡고 냄새 맡고 책임지고 시간적 인터벌을 허용하거나 다른 만남들과 함께하는 만남은 아니다. 식사시간에도, 공부시간에도, 잠자리에서도 스마트폰과 만나면서 바로 옆의 사람들과는 못 만나는, 홀로 아닌 홀로 속에 현실감각을 잃어간다.
끊임없는 만남 속에 끊임없이 떠나간다는 것이다. 함께 있지만 따로 있으니, 일종의 ‘따로 함께’ 내지 ‘함께 따로’라 할 것이다.
현실 공간 속의 만남들이 ‘따로-적’이니, 가상공간 속의 만남 내지 간접-만남이 더 ‘함께-적’인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현실의 함께가 많이 ‘따로-화’되니, 가상의 따로가 대신 ‘함께-화’되는 논리라고나 할까? 그러나 SNS 환경을 진정한 소통 키움의 한 좋은 계기로 살릴 방법을 연구해가야 할 것이다. 따로의 크기가 아닌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계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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