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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헤어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2009년부터 한민족의 고유 머리모양이었던 상투머리가 연예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젊은 세대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새로운 상투머리가 등장한 것이다.
1895년 일제의 억압 아래 을미개혁이란 이름으로 강제 시행된 단발령(斷髮令), 왜 우리 조상들은 단발령에 반발한 것일까? ‘목은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던 우리 민족에게 상투는 어떤 의미였을까? 한민족의 상징인 상투의 역사와 참의미를 통해 우리 조상들이 상투를 지키고자 했던 실제 이유를 찾아가보자.
■ 조선을 뒤흔든 을미개혁
1894년부터 조선의 정국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청일전쟁, 김홍집 내각 출범, 갑오개혁, 을미개혁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와 동학군 토벌 등을 통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철도와 전신사업 등 이권을 빼앗고 막대한 차관을 통해 조선의 경제를 좌지우지했으며 남부 곡창지대를 일본의 식량기지로 삼았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일본이 꿈꾸었던 정한(征韓)의 길이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고종 부부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가까이 지내고 친러파 중심으로 개각을 단행한다. 그러자 일본공사를 역임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더 이상 온건한 방법으로 고종을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극약처방을 준비했다. 그것은 고종의 두뇌인 명성황후를 제거함으로써 더 이상 다른 뜻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와 함께 출동한 낭인들은 옥호루로 달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성황후에게 칼을 휘둘러 시해한다.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고종의 친러정책을 틀어막은 미우라 고로는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내각을 재구성해 이른바 을미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1895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많은 개혁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되었다. 그 중 백성들의 반발을 가장 크게 불러일으킨 것이 1895년 11월 15일 공포된 단발령이었다. 그러자 정책입안자인 유길준과 조희연은 궁궐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때 고종이 제일 먼저 단발을 당하였다.
지금 머리를 자름은 살아가는 데 이롭고 일을 할 적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우리 성상 폐하께옵서 정치 개혁과 민국부강을 도모하사 솔선 궁행(躬行)하사 표준을 보이심이라. (『고종실록』 32년)
그러나 조정에서 전국에 체두관을 파견해 단발령 시행을 강요하자 백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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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투를 자르는 체두관의 모습 |
다. 항간에 “임금과 왕세자가 상투를 자른 것은 왜놈들의 협박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고, 단발령과 함께 국모 시해 소식이 알려지자 1896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수령들은 더러 상투를 잘라 백회(百會)를 드러내 놓고는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묶어 머리를 두르고서 상투 없는 것을 표시했으며 더러는 깡그리 깎아 시세를 따르기도 했지만 이민(吏民)들은 한사코 단발령을 거역하여 기한을 여러 번 물렸다. (『매천야록』)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상투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상투를 트는 성인식인 관례의 의미에 대해 알아야 한다.
■ 상투와 관례(冠禮)
관례(冠禮)는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춘기 남녀, 곧 생리적인 전환기에서 일정한 시기에 이제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의식이다. 그 시기가 15세 전후가 된다. 중국에서도 '남자년십오지이십 개가관(男子年十五至二十 皆可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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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규삼 : 조선시대 남자 아이의 관례복 |
이를 일반적으로 성인식(成人式) 또는 성년식(成年式)이라고 한다. 여자의 경우에도 15세가 되면 허혼이 안 되었더라도 계례(戒禮)를 해야 하는데 이를 성녀식(成女式)이라고 한다. 보통 결혼 전에 하는 예식으로, 15∼20세 때 행하는 것이 원칙이나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복(喪服)이 없어야 행할 수 있었다.
관례의식의 절차를 살펴보면, 우선 덕망과 학식이 높은 분을 빈으로 모시고 거행하는 데 본격적인 의식은 삼가례(三加禮)로 옷을 세 번 갈아입는 것이다. 즉 초가(初加) · 재가(再加) · 삼가(三加)의 절차를 밟는다. 관례에서 삼가례를 하는 이유는 관례자가 평소 입던 동자복을 ‘평상복 ⟶ 외출복 ⟶ 예복’ 순서로 입음으로써 어린이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때 남자는 상투를 짜고, 여자는 쪽을 쪄서 머리모양에 변형을 가했다.
구체적으로 초가에서는 수관자(受冠者)가 머리를 틀어 올린 쌍계(쌍상투)를 합해서 하나로 쪽지고 망건에 관을 씌운다. 옷은 입고 있던 사규삼을 벗기고 심의(深依)를 입힌다. 재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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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건 |
초가에서 쓴 관건을 벗기고 사모(紗帽)를 씌우고 심의 대신에 조삼을 입히고 가죽띠를 띠고 계혜(繫鞋)를 신긴다. 삼가에서는 복두를 씌우고 난삼에 띠를 띠고 신을 신긴다.
그리고 세 번 모두 빈이 '금월길일(今月吉日)에 시가원복(始加元服) 하나니 기이유지(棄爾幼志)하고 순이성덕(順爾成德)하라'는 축사를 낭독하는데, 여기에는 유치한 어린이에서 어엿한 성인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삼가례가 끝나면 사당에 고하고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옛날 사람들은 관례를 혼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완전한 성인(成人)으로 대우를 받았다.
[ 글 : STB상생방송 구성작가 김덕기 ]
김가연 기자 k-gaye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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