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16)

" 소통 않고 살 수 있을까? "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삶은 소통이다... 탈-폭력

사람들의 삶의 크기, 행복크기는 그들이 나날이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인적 물적 존재들과의 소통이 어떤 방식이고 모습이냐에 크게 좌우된다. 무시하거나 위협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비하하는 만남이 있으며, 빼앗는 만남, 때리는 만남, 일시키는 만남, 밀어내는 만남, 도망가는 만남, 떠나가는 만남, 속이는 만남, 죽이는 만남도 있다.

집 안에서든 밖에서든, 상대로부터 어떤 말이나 표정의 대함을 받았느냐에 따라, 온종일 즐거울 수도 우울할 수도 있으며 여유로울 수도 있고 초조할 수도 있다. 반대로 상대를 내가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상대의 상태는 크게 좌우된다.

우울함에 비능률과 스트레스가 겹치며, 이들에 이차, 삼차 부작용들이 뒤따른다. 우연으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다가 급기야 병원으로까지 실려 가게 된다. 그 전에 올레 길, 둘레 길로 피신할 수 있다면, 이는 가까스로 구조되는 행운일 수 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보이게 안 보이게, 직접적 간접적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소통들의 전체 작용맥락을 ‘소통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문화에는 전통이나 정치, 경제, 교육 등의 제도, 관습이나 문화, 도시구조, 생산력이나 고용구조, 사고방식, 미디어, 생태 등이 하나의 방식으로 녹아 있다고 할 것이다.

멀리는 역사가 가까이는 일상 경험이 잘 말해주듯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계층(계급)과 계층(계급), 정당과 정당, 남성과 여성, 세대와 세대, 문화와 문화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물질적 정신적 관심이나 이해(利害), 나아가 이해(理解)는 나뉘게 마련이다.

나뉜 관심과 이해(理解), 이해관계 속에 물질적 정신적 삶의 제 수단들을 만들어내고 교환하고 사용하는 사회적 삶의 방식에서 늘 크고 작은, 보이고 안 보이는 불협화음과 갈등, 싸움들이 일어난다. 사회, 윤리, 정치 등의 이론에서 이런 싸움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조율되고 넘어서지는지가 늘 관심사다.

폭력은 늘 힘이 있는 쪽에서 힘이 없는 쪽으로 향한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보고 ‘힘으로 하자!’고 하지는 않는다. 사슴의 무리는 힘으로 덤비는 사자를 피해 도망간다.

제도정비나 문명화가 덜 된 데에서, 폭력은 쉽게 사용될 수 있다. 아니, 문명의 이름으로 훨씬 거대한 폭력이 또 하나의 방식으로 자행된다. 20세기의 양대 세계대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함께의 크기, 소통의 크기 혹은 사람크기, 삶의 크기의 문제에서 언어 폭력, 도덕 폭력, 힘 폭력, 돈 폭력, 지식 폭력, 문화 폭력, 성 폭력, 신념 폭력, 취미 폭력, 군사력 폭력, 전통 폭력, 사기 폭력, 지위 폭력 등 다양한 폭력들을 물으며 드러내고 벗어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일방적인 제멋대로’가 갑질이자 폭력이다. 예를 들어, 묵자는 약자에게 겁주기 ‘겁약’(劫弱),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사납게 굴기 ‘폭과’(暴寡), 어리석은 사람들을 꾀로 좌우하기 ‘모우’(謀愚), 빈천한 자에 오만하기 ‘오천’(敖賤) 등의 다양한 폭력 내지 갑질들을 천하의 ‘큰 해로움’(大害)이라고 한다.

우리들이 함께 사는 방식을 크게 결정해온 유교는 외적 세계에서 ‘남’과 싸움을 하지 않기 위해, 내적 세계에서 ‘자신’과 미리 싸우는 수신(修身)의 논리를 강조한다.

‘자신을 이기고’(克己) 남들의 있음 내지 삶을 인정하려는 수신은 절욕(節慾), 아스케제(Askese)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강조는 수신이 나오는 사회적 제 전제들이나 수신에서 나오는 제 결과들을 반성하는 일과 늘 함께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도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함께’를 보다 잘 하기 위해 이야기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남이 잘못하여 생기는 문제까지도 나의 잘못된 수신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있어, 문제를 풀기보다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남도 사람, 나도 사람인데...

그리하여 잘못이 ‘있는’ 사람들이 잘못이 ‘없는’ 사람들로 둔갑하기 위하여, 이런 도덕을 찬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수평적일 때보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 논리는 보다 심각해질 수 있다. 힘의 균형을 잃을 때, 제멋대로는 보다 쉽게 발생한다.

따라서 도덕을 말할 때,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조심스럽다 할 것이다. 하나는 내적 크기인 도덕이 외적 크기에 의해 왜곡되거나 감염되기 쉽다는 점이고, 하나는 도덕이 밥과는 무관하여 사치스럽거나 사람을 얽어매는 거추장스런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폭력과 이어질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도덕의 이름을 한 폭력? 혹은 도덕의 옷을 입은 폭력? 그리하여 도덕 폭력? 반대인 경우는 없을까? 

약한 자들의 입장도 인정, 배려하고, 함께하는 삶에서 사치가 아니라 필수이며, 사람들을 얽어매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도덕 말이다. 

감추는 도덕이 아니라, 드러내는 도덕? 사람크기, 함께 크기를 키우는 도덕? 그러니까 ‘더 사람’, ‘더 함께’의 도덕. 이는 힘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보다는 힘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더 말하고 더 찾는 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도덕을 찾지 않아도 될 때까지 찾는 도덕이랄까? 이는 그렇다면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자신을 일으키는 도덕? 혹은 ‘최소 도덕’? ‘좋은 도덕’?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