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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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나의 입만이 입이다 - 당신만 힘들어?
듣지 못하는 말도 많고 듣지 않는 말도 많다. 나의 말만 말이고 싶어 한다. 나의 말만 들어라 한다. 나의 말은 다 하고 남의 말은 피한다. 혹은 모두가 말을 않는다. 아니, 못한다.
부부 사이에서도 대화는 별로 없고, 있어도 표면적이다. 시간도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가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면 ‘큰소리’다.
부인: 나 오늘 힘들었어~.
남편: 당신만 힘들어?
부인: 말을 하는 내가 미쳤지!
말하는 것이 미친 일이라니! 부인의 말에 남편은 대뜸 당신만 힘드냐며 듣기도 대답하기도 거부한다. 긴장이 감돈다. 일촉이면 즉발일 것 같다.
이해는 된다. 둘 다 실제로 힘이 드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부인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즉시 포기한다. 아니, 포기 당한다.
상대의 힘을 끌어 들여 나의 힘을 내려 했다가, 나의 힘만 빠질 판국이기 때문이다. 힘이 달려서 상대의 힘을 내 안에 들여 힘을 내 보려 했는데, 힘이 달려 낼 힘이 없기는 상대도 마찬가지다. 쫓고 쫓기는 외로운 삶 속에, 남편이든 아내든, 남의 자리에 서본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남의 자리에 서보기는커녕, 남의 말을 듣는 일조차 힘에 겹다.
이런 삶이 지속되면, 남편은 급기야 원수 같고 내 편이라기보다 ‘남 편’ 같아진다. 아내는 갈수록 바가지만 긁고, 남편은 갈수록 고립된다. 부부는 자주 따로이고 싶어 한다. 여-편은 안 들어왔으면 하고, 남-편은 안 들어갔으면 한다. 만나면 겁나고 떨어지면 오히려 편안하다. 그래도 들어올 수밖에 없다. 혹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따로 함께’이다. 둘 사이에 오고감이 거의 없고, 함께가 거의 없다. 며느리가 거실로 나오면 시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고, 시어머니가 거실로 나오면 며느리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런 함께의 크기에서 삶의 크기, 행복크기는 크게 작아진다. 이렇게 같이 살다 보면, 아니, 따로 살다 보면, 남는 것은 상처와 멀어짐이다. 막힘과 떨어짐 속에 불화가 싹튼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데 불화만 깊어지니, 만사는커녕 십사(十事)도 어렵다.
화합(和合)은 서로가 다르지만 같이 함께함이다. 서로의 다름에 대한 서로의 인정과 관심이 공감과 화합의 전제이자 결과이다. 화(和)는 쌀밥(禾)과 먹는 입(口)이 서로 잘 어울리는 만남의 모습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부부 사이에 힘의 차이라도 나면, 센 쪽은 약한 쪽을 좌우하려 한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소통이 외적인 힘으로만 결정될 때, 불통은 쉽게 일어난다. 같은 사람으로 존중함은커녕, 힘으로써 강제하고 누르려 한다. 힘 있는 쪽은 힘 있다고 급기야 힘으로 말을 못하게 하며, 때리고 무시하고 겁주고 강제한다.갑질이다.
사랑해서 만난 사람들이 어떤 때는 죽인다. 혹은 죽는다. 적어도, 상대에 무관심해진다. 무엇보다 외적 크기, 물질 크기 위주로 ‘함께 할 수 있음’, ‘함께 하고 싶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리라.
가치, 취향, 정신, 정서, 의지, 사랑 등의 ‘내적 크기’는 무시되거나 왜곡되었다. ‘외적 크기’로만 배우자가 결정되고, 부모나 친구, 친지들에 의해 혼수와 결혼식이 결정되는 상황 속에서, 진정한 함께와 사랑은 기대하기 어렵다. 외-적 크기, 외-부 사람들이 결정한 함께이니, 일종의 소-외다.
돈을 보고 결혼했더니, 배우자는 그 돈을 다른 이성을 만나는 데에도 사용하고 돈에서 열등한 나에게 화를 내는 빌미로도 사용한다. 돈 좀 줄 것 같아 결혼했더니, 줄 듯 줄 듯 안 준다. 법정에서 호소할 일도 아니고... 내가 ‘높인 돈’이 나를 ‘낮추는 돈’으로 드러난다. 나는 돈을 한없이 크게 대했는데, 돈은 나를 한없이 작게 대하네...
어떤 면에서는 부당해 보이기도 하다. 돈을 의미로 결혼했는데 이제 돈이 없어졌으니, 결혼은 결국 무의미하게 되었다. 진퇴양난이다. 이혼하여 갈라서자니 나의 자립도 남의 시선도 문제이고, 함께 살자니 여전히 빙탄지간 속 긴장의 나날이거나 무의미한 나날일 뿐이다.
‘큰 물질크기’에 초점을 맞춘 결혼은 ‘작은 소통크기’의 큰 원인이 된다. 그리고 ‘작은 소통크기’는 ‘큰 물질크기’만 보는 한 큰 원인이었었다. 서양 최초의 철학자로 말해지는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547)는 ‘불의로 부자 되지 말라.’고 했다. 공자가 한 말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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