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권력이 가장 고심한 것 중의 하나가 민족문제였다 "
요즘은 종교뿐만 아닌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때 아닌 ‘유사’라는 말로 곤욕을 치르는 분야들이 생겨난다. 유사역사학, 유사과학(pseudo-science)… 말 그대로 ‘역사가 아닌 역사, 역사 비슷한 역사’라는 비난이고 ‘과학이 아니면서 과학인 척 한다’는 비아냥이다.
이는 과학철학에서 소위 ‘구획문제(demarcation problem)’라 한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학자가 칼 포퍼(Karl Popper)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획문제에 대한 해답이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었다.
최근 대학수학능력 시험에도 등장했던 문제가 하나 있다. ‘모든 백조는 희다’는 과학적 주장인가? 아니면 유사과학적 주장일까? 하얗지 않은 백조가 발견된다면 이 주장은 귀납에 의해 반증 가능하다. 그래서 이 주장은 과학적 주장이 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것이야말로 절대적 진리이다.’ 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유사과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이란 괴롭힘도 큰 폭력이다. 역사에는 사실이냐 아니냐가 있을 뿐인데, 불리하면 상대방을 유사역사학으로 공격해 버린다. 그러나 역사학 분야에서는 수긍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상고사의 경우란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 파편화된 자료에서는 해석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일 것이다. 그래도 옳지 않고 떳떳치 못한 태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유사’를 곧바로 ‘사이비’로 왜곡시켜 버리는 태도이다. 이 연결을 종교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종교의 구획 기준은 뭘까?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가설은 반대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유사과학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는 종교교리이지 유사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권력은 이런 논리적 근거로 종교와 유사종교를 나눴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시선에서 식민정책에 위험스럽다고 생각된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종교와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시선이었다. 프랑스의 종교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 Durkheim)이 들었으면 놀랄만한 시선이다. 그는 “그릇된 종교란 없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진실하다. 그 방법들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종교는 인간존재의 주어진 여건들과 부합된다.”고 선언한다.
일제강점기에 밖에서 들어온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취급하고 이 땅에서 자생한 민족종교들에 ‘유사종교’란 굴레를 씌우는 것은 어처구니없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무엇이 종교이고 무엇이 유사종교인가.
이 땅에서 만들어져 일본열도로 건너간 신도신앙이나, 한 때 유태인의 민족종교였던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하는 시선으로 본다면, 유교나 불교가 종교와 거리가 있는 유사종교가 아닐까? 오히려 민족종교가 좀 더 종교에 가까운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인 보천교는 소위 유사종교의 대명사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종교’와 ‘유사종교’ 분리는 이후 계속하여 종교정책에 적용되어 소위 민족종교들이 유사종교로 통제를 받게 되었다. 감독 혹은 단속 기관도 분리되었다. 소위 ‘종교’인 신도, 불교, 기독교는 학무국(學務局) 소관이었고, 그 외의 ‘유사종교’ 단체들은 헌병경찰기관의 담당이었다. 1919년의 관제가 개정된 후에는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아래 두었다.
식민권력이 가장 고심한 것 중의 하나가 민족문제였다. 그런데 유사종교단체들은 추종자 대부분이 과거 지배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던 사람들이었고, 그 교의도 후천개벽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에는 억압받는 한민족이 세계의 중심민족이 된다는 등 한민족의 자존감과 자주의식을 고취하면서 민족문제와 연결되기 쉬운 단체들이었다. 더욱이 유사종교는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에 민족애와 조선 고유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민중들의 마음을 붙잡고 절망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침투하여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며 민족운동과 연관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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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전투 승전기념. 만주 독립운동은 민족종교 대종교 신도들이 주축이 되었다. |
강점 직후에 유사종교 중 식민권력이 가장 주목한 단체는 천도교와 대종교였다. 그러나 천도교는 강점 후 국권회복을 위한 직접적인 항일운동보다는 장기적인 민족교육과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방침을 채택하여 1910년 12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는 등 전국에 강습소를 설치하고 교육사업에 주력했다. 대종교는 만주지역으로 옮겨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식민권력은 이들 종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차월곡 교단에 주목했다.
차월곡 교단은 1894년 동학혁명의 세력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차월곡의 부친 차치구도 동학혁명 당시 동학의 접주로 처형당했고, 강증산도 동학혁명의 전 과정을 직접 목도했고 혁명군을 따라 다녔다. 그 제자들이나 차월곡의 추종자들도 과거 동학혁명과 연관되어 있는 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차월곡 교단이 충분히 민족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유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식민권력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19년에 발발한 3·1운동은 식민권력으로 하여금 1910년대 전개해온 종교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3·1운동 주도세력이 종교단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유사종교의 대표격인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식민권력은 경찰권력에 의한 강력한 유사종교 단속에도 불구하고 유사종교가 근절되지 않고 지하에 잠복하여 계속 존속했으며,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 다수는 여전히 유사종교에 친밀감을 보이고 있다고 인식했다. 이에 따라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키고 잠복된 조직을 확인하여 말살시키려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10년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많은 교도와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던 차월곡 교단은 이러한 식민권력의 유사종교 통제정책의 주요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식민권력은 보천교로 하여금 비밀스런 교단 조직을 스스로 세상에 공개토록 회유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개하면 ‘유사종교’를 벗어나 ‘종교’로 공인해 주겠고, 차월곡에 대한 체포령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곧 모르는 적은 위험했고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차월곡 교단은 그 동안 유사종교로서의 활동의 서러움을 생각하면서 ‘보천교’라는 교명 등록과 함께 교단을 공개했다.
그러나 교단 공개 이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식민권력은 공개 전의 약속과는 달리 각 지역에 설립된 진정원(眞正院) 단속은 물론 교주 체포령도 거두지 않았다. 드러난 조직을 토대로 보천교 교단을 수월하게 요리해 나가면서 교단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조직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일제의 회유정책과 물리적 탄압을 동시에 구사하는 정교한 말살책이 실효를 거두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신지식인들과 언론 등도 통제하여 여론을 조작해 나갔다. 식민권력의 집요하고도 교활한 탄압으로 보천교의 교단 공개와 함께 노출된 조직은 손쉬운 여론조작 대상이었다. 유사종교=사이비 종교로 등식화시켰다. 성공적이었다.
기독교 등 소위 기득권을 지닌 ‘종교’세력과 ‘근대’적 겉멋에 취해 있었던 소위 신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보천교를 성토했다. 당시 언론들도 공개된 보천교를 공인종교로 인정키 보다는 비인륜적인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로 거칠게 매도해 나갔다. 공인되지 않은 종교는 유사종교이며 유사종교는 곧 사교(邪敎)라는 언론의 사고는 식민권력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역사도 일천하고 이제 막 날개를 달아 하늘을 훨훨 날려던 보천교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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