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18)

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나의 입만이 입이다! - 너는 아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말을 걸지 못하고 말을 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인이 ‘나 오늘 힘들었어~.’라고 하니, ‘당신만 힘들어?’라고 했다.

자식이 ‘나 스트레스 받았어!’라고 하니, 이번엔 ‘공부만 하면 되는 너희들이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 있냐?’라고 한다. ‘그래, 많이 어렵지?’란 말이 안 나온다.

공감(共感), 동정(同情), 이해의 ‘같은 마음’이 안 일어난다. 남이 하는 공부지만, ‘~만’이라는 조사와 함께 남의 문제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나도 어렵다!’ 혹은 ‘너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상대의 어려움은 생각하지 못한다.

서로 자신의 어려움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다른 어려움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생각크기, 여유크기가 안 된다. 어려움은 나에게서만 찾아지고 원인은 남에게서만 찾아진다. 

길이 꽉 차있을 때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빈 곳이 들일 수 있다. 없어야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험준한 산과 파도, 높은 성곽이나 벽, 막다른 골목 등의 거부하는 물질로 꽉 차든, 적대감이나 무관심 혹은 아집 등 밀어내는 정신으로 꽉 차든, 꽉 차서 막힌 길에서 이동과 만남은 불가능하다.

소통의 전제 가운데 하나가 빈 공간이라면, 이는 이동의 길도 도착할 곳도 비어 있어야 함이다. 탁구공이 이동할 길이 막히거나 도착할 공간이 너무 좁다면, 탁구공은 빗나갈 것이다.

근대화, 도시화 속에 부모님들은 시골에 남고 자식은 도시에 사는 경우가 많다. 늙은 부모님들은 항시 도시의 자식들과 만나고 싶어 하지만, 여의치 못하다. 부모자식 간에 보다 ‘잘 통한다면’, 보다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금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난 걸까?

이동의 길은 뚫려 있지만, 이동해서 도착할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을 때도 많다. 호텔이든, 친척네든, 친구네든 유숙할 곳이 있어야 먼 길을 떠날 수 있을 텐데... 부모와 자식 간에 도로나 자동차, 전화나 은행, 택배 등 ‘외적인 길’은 얼마든지 나 있는데... 이들 사이에 비어 있지 못한 것은 ‘마음의 길’과 ‘마음의 방’이다.

무엇보다, 서로가 관심이 없거나 서로를 틀렸다고만 하기 때문이다. 두 배가 넘는 먼 거리도, 상대가 마음이 잘 통하는 애인이나 친구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는데...

양쪽 모두에게 맞고 틀린 것, 좋고 나쁜 것들이 섞여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이들의 행동이나 판단은, 사실은, 시비(是非)나 정사(正邪)로 잴 수도, 잴 필요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왜 시비정사로 재고, 좁은 추측이나 치우친 판단에 고정되고, 이런 ‘허위의식’에 때로는 목숨을 맬까?

왜 선악의 이름표를 붙이며 선악을 나누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 정죄하려 할까? 나의 잣대를 그렇게도 확신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만 이럴까?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