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와 보천교의 연결성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
“보천교의 ‘조만식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이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입니까?”
사람들이 궁금하여 종종 묻는다. 아마 몇몇 사람들이 그리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아니다.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보천교의 ‘조만식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는 ‘권총단 사건’으로 기사화되었고, 식민권력의 문건에서는 ‘대정 8년(1919) 제령(制令) 제7호 위반 강도죄 사건’으로 알려진 ‘정의부(正義府) 및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계획에 관한 건’(秘 關機高授第 32743號)과 ‘보천교도 등의 시국표방강도에 관한 건’(1925. 11. 20)이라는 보고서로 드러난 사건이다.
경기도 경찰부는 “1925년 11월 13일, 권총을 휴대한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식민권력이 사용한 용어) 한 무리가 보천교 간부와 제휴하여 조선독립 군자금을 모집 중인 용의자에 대한 수사 명령을 받았다. 그러다 조선 남부 방면에 출장 중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173번지의 보천교 북방 방주 한규숙 집에 그들 용의자들이 숨어있음을 탐지해 검거했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불령선인은 정의부 요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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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부는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여러 가지 제약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에 1922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한독립단 등의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고, 그 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발전되었다. 그 뒤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통합운동이 재개되면서 대한통의부·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 등의 각 대표들이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에 모여 통합회의를 개최한 결과, 1924년 11월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정의부와 보천교의 연결성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정의부 지부장 회의 개최□□에 관한 건’ 1925. 3. 13)가 있다.
“길림에서 돌아 온 보천교 간부 김응두(金応斗)의 당지(當地) 경찰관헌에게서 흘러나온 바에 의하면, 길림성에 본부를 둔 정의부에서 군사, 서무, 재무, 외교, 사법, 경찰, 교통, 실업(實業), 참모 9부를 두고 이 사무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종래와 같은 방침으로는 도저히 독립□□이 의심스러워서 최근에 이르러 실업 및 교육 방면에 뜻을 두고 우선 실력 양성을 촉진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도 어느 정도 정의부와 보천교의 연계가 추정 가능하다. 여기의 보천교 간부 김응두는 1919년 대황산에서 60방주를 고명(告名=조직)할 때 북방주의 직책을 맡은 김영두(金英斗)로 짐작된다. 그는 1921년 음력 3월경 교도들로부터 군자금으로 모집한 20만엔(円)을 갖고 나가 행방불명이 되어, 이에 정읍경찰서가 탐지하고 그의 소재를 수사하고 있었다. 식민권력으로서는 3.1운동 이후 해외 독립운동단체로 연결되는 군자금은 매우 예민한 문제였고, 때문에 보천교의 자금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주지역의 정의부도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의 보천교와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보천교 교단은 교도들이 직접적으로 항일항쟁에 나섰다기 보다는 군자금 지원 등 간접적인 방법에 의한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관련된 자가 보천교 쪽에서 25명 이상이나 되었으며, 그 중 조만식 한규숙·박자혜·정찬규·이춘배 등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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