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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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나의 입만이 입이다 - 너무 달라서이고 너무 같아서이다
내가 닫으니 상대가 닫고, 상대가 닫으니 나는 더 닫는다. 남의 생각을 ‘들임’에서 불통인 만큼, 자신의 생각을 ‘냄’에서도 불통인 것 같다. 명령조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받는 상대가 ‘점령’당하기를 거부할 땐, 나는 화와 짜증을 내고, 큰소리를 치고, 때리고, 빼앗으며, 으르고, 면박주고, 해고하고, 죽게 하면서 상대를 상대한다.
물론, 나의 힘 크기가 이를 받쳐줄 수 있는 만큼만 그렇다. 나와 남의 나뉨과 위아래의 나뉨이 함께하는 순간인가?
일방적인 소통문화 속에서는, 드러나든 안 드러나든, 화가 쉽게 함께한다. 이럴 때, 상대의 사람다움의 크기는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 이 땅에서 예(例)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예(禮)는 아니다. 화(火)를 자주 내게 되니 혹은 화를 자주 참게 되니, 아홉 구(九) 밑에 불 화(火)를 붙여 ‘욱할 욱’ 자를 만들어 써야 할 것도 같다.
나와 남의 나뉨 크기는 위와 아래의 나뉨 크기에 많이 비례하는 것 같다. 위아래의 사이가 벌어질수록 나와 남의 사이가 벌어지며, 나와 남의 사이가 벌어질수록 위아래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 같다. 두 나뉨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다.
아버지는 성전환 수술을 하려는 아들에게 분노에 차 ‘미친놈아, 의절이다!’라고 말한다. 성전환 수술은 오랜 기간 죄악시되면서 억눌려왔다. 그런데 더 이상 억누르면 죽을 것 같아, 너무나 커다란 생각의 차이로 감당키 어려운 반응을 예감했음에도, 살기 위해, 죽으면 말 셈으로 용기를 내어 가족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가족, 특히 그 중에서 가장 ‘경찰적인’ 아버지는, 이런 자식을 가족에서 아예 떼어-내려 한다. 아들이 어떤 어려운 상황인지, 왜 수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사정을 아무리 사정해도, 아버지는 조금도 들으려 않는다. 오히려, 정신치료를 강요하고, 집요한 설득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성전환이나 동성애는 전통이나 관습 등 지금까지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발상이고 행동인 만큼 강하게 거부된다. 이런 거부는 나에, 같음에 머물러야 한다는 강한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설적이지만, 너무 달라서이고 너무 같아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서처럼, 이 아버지도 같음만을 인정하는 ‘노자2’에 매우 가깝다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동성애자들이 죽거나, 살아도 죄인처럼 죽어 산다. 이들이 죽으면, 자살일까 타살일까? 어떤 이름이 ‘바른 이름’ 정명(正名)일까?
전달(mit-teilen)로서의 소통은 ‘함께’(mit)이고 ‘나눔’(teilen)이라 했다. 남과 만나면서 나이려고만 한다면, 만나려고 하면서 동시에 피하는 모습이 아닐까? 만나면서 나를 비우고 나누려 하지 못한다면, 쌍방은 일방으로 변한다. 다름 둘이 같음 하나로 되는 순간이다. 아래에 나올 ‘병질’(竝-)에서처럼, ‘다를 수 있는 같음’ 내지 ‘같을 수 있는 다름’에서처럼 수직의 병탄(竝呑)이 아닌 수평의 병렬(竝列)이 같이 사는 길일 텐데... 사람-같이,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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