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장덕준 선생은 우리나라 신문 역사상 첫 순직 기자이다.
선생의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호는 추송(秋松)으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다. 장붕도(張鵬道)의 아들이며, 동생 장덕수(張德秀)는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었고, 막내 장덕진(張德震)은 독립운동 중 상해에서 순사(殉死)하였다.
1920년 4월 1일 선생은 김성수 이상협 박영효와 함께 동아일보를 창간한다. 즉 '동아일보'의 창립멤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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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첫 창간호를 내놓으면서부터 동아일보는 일본에 대한 공격, 독립당의 활약을 집중 보도했고 결국 같은 해 1920년 9월 25일 총독부로부터 신문사 정지 명령을 당한다.
기자는 붓으로 항일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며 신문을 통해 자신은 독립운동을 하겠다던 정열적인 사람. 지병으로 폐결핵을 앓았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기에 그의 욱하는 성질을 말리다 생기는 여러 일들을 역사는 전한다.
선생은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 한 뒤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으로 있다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간 뒤 미국 의원단의 활동을 취재하며 그들에게 일제의 만행에 대해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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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일본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패하여 (이범진, 김좌진 장군의 활약)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무고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이 소식을 듣고 모두가 만류하며 앞을 막을 때 장덕준 선생은 결국 전투지와 다름없는 훈춘 지역으로 떠난다.
당시 동아일보는 정지 명령을 받았기에 신문사가 없는 기자의 신분이었음에도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당시 그는 창립멤버이자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하던 자리였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국장급) 권위와 직위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현장으로 달려갔다
역사기록에는 장덕준 선생이 훈춘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활동을 했는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1920년 11월 6일 간도 용정에 있는 여관에 짐을 풀고, 일본군 헌병대장을 찾아가 훈춘에서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고 강력히 항의했으며 그 순간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며 발뺌하며 선생을 돌려보낸 일본 군인들은 헌병 몇 명과 함께 공동조사를 나가자는 말을 빌미로 선생을 산속으로 끌고 갔고 그 후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은 ‘장덕준 씨 조난 논평’이라는 제목하에 선생이 일본군에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선생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시신조차 돌아오지 않았지만 당시 시대 전후 상황을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바보 천치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장덕준 선생의 첫째 동생 장덕수 선생은 해방 후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고, 막내동생 장덕진 선생은 상해 독립당에서 활동하다 변을 당하셨다. 일가 3형제 전부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6.25를 겪고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자식 3명을 독립운동가로 기르신 위대한 어머니, 자식 세 명을 잃으며 되찾은 광복. 어머니가 6.25전쟁을 겪으실 때의 심정, 그리고 그 후의 대한민국을 바라보실 때 어떤 심정 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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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먹하고 죄송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막을 수가 없다.
장덕준 선생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 청년 지사였지만 결국 일본 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언론인으로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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