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 |
|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나의 입만이 입이다 - 너무 달라서이고 너무 같아서이다
부자지간, 부부지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을 떠나 학교에서든, 일터에서든, 국회에서든, 군대에서든, 상대와 소통할 때, 세상이 원인이든 내가 원인이든, 내 멋대로나 내 맛대로 혹은 내 습관대로에만 머물면 막힌다. 막힌 소통(疏通)은 ‘작은 통함’인 소통(小通)일까? 아니면 소통을 해소(解消)하고 소멸(消滅)하는 소통(消通)일까?
사람들은 쉽게 가까운 것만 보고 가까운 것만 듣는다. 그리하여 내 것에, 같은 것에 쉽게 갇히고 붙들리게 된다. 자신에 붙들린 부모는 자식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잔소리하며 무관심하다가 급기야 폭력적으로 변한다. 때문에, 자식은 가출도 한다. 부모도 자식도 자신에 붙들려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며 화를 낸다.
남도 하고 싶은 ‘다른 말’이 있는데, 남의 말길을 막거나,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말과 ‘같은 말’만 하라고 한다. 어떤 때는 생각도 자신과 ‘같은 생각’만 하라고 한다.
그렇다고 다름을 만나고 경청하고 인정하는 일이 나를 버리고 다름에 조건 없이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인정함은 상대에 ‘그냥’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같음에서 출발하면서도 다름에 보다 열려서, 상대와 생각을 나누면서 보다 객관적으로 사실과 진리를 찾으려는 자세라 할 것이다.
내가 그냥 너로 되기 ‘너-화(化)’도 너가 그냥 나로 되기 ‘나-화(化)’도 모두 일방이다. 내가 너로 되면 내가 없어지고, 너가 나로 되면 너가 없어진다. 나 없는 아니면 너 없는, 혹은 나만 있는 아니면 너만 있는 나와 너이니, 어찌 보면 ‘정말 함께’지만, 이는 정말 ‘아닌 함께’, ‘같잖은 함께’이다. 다른 표현으로, ‘나쁜 따로 함께’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경청함이 ‘더 함께’와 - 나든 너든 - ‘더 사람’이기를 위한 사실과 진리를 위해 서로를 기워주고 키워주는 자세이지, 결코 나를 버리고 상대를 무조건 받아들임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에 붙들리기 쉬운지라, 치우쳐 있는 자신을 열고 이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상대들을 인정하라고 강조하는 것뿐이리라. 다만, 여기서 ‘진리’ 개념은 많이 열려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까뮈(Camus, 1913~1960)에게 ‘사람은 항상 자신이 믿는 진리들의 희생양이 된다.’ 그리고 니체(Nietzsche, 1844~1900)에게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적’이다. 반면, 뉴턴(Newton, 1642~1727)은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의 친구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는 진리다.’라고 했으며,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다.
경청(傾聽)은 상대의 입에 내 귀를 기울여 상대의 메시지를 보다 정확히 받아내어 이해하려는 자세다. 경청하다는 독일어로는 ‘zu-hören’(쭈-회렌)이다. zu(쭈)는 ‘~로’, ‘~을 향하여’(傾)의 뜻이 있으며, hören(회렌)은 ‘듣다’(聽)의 뜻을 가진다.
상대가 보내려는 메시지를 정확히 알아야, 나는 받아들이면서든 거부하면서든 이를 존중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이 그런다.
상대의 다른 시각과 경험으로부터 나의 같음은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다. 여기에서 상하의 권력 논리가 개입하여 강자의 힘이 상대의 말을 일방과 억지로 억지(抑止)하는 근거로 될 때, 문제가 생긴다.
경청에서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 의지에, 내 위치에, 내 나이에 혹은 내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 혹은 맞느냐 틀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만, 나의 입장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 입장과 시각을 약간만 바꾸면, 나는 어느새 남이 되고 남은 어느새 내가 된다. 나도 남이고 남도 나임을 알기가 혹은 알아도 인정하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보다. 나도 입이 있는 사람이고 남도 입이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보다.
‘같음’을 그리 좋아하는 우리들이지만, ‘다 같은 나’인데, 나 밖의 나도 또 하나의 나라고 인정하기는 내켜하지 않는다. 남들 보기를 그리 좋아하는 우리들의 시선이지만, 남들은 안 보이는가 보다. 그렇다고, 나는 진정 잘 보이는가? ‘너 자신을 알라!’가 불필요할 정도로? 문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아야 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