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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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위의 입만이 입이다 - 어른을 가르치려 하느냐?
이 땅에서 윗사람이나 윗자리가, 일방적으로 통고(通告)하고 하달(下達)하는 소통 아닌 소통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본다. 보는 자신도 하나의 위일 때는 이런 모습을 보인다. 다양한 종류의 윗사람들과 윗자리들이 있다. 이런 윗자리들에 잘못 근거한 일방과 수직주의는 우리들의 함께 크기와 사람크기를 크게 작게 만든다.
‘면담하고 대화하자고 하면서 업무지시만 내리는 그룹의 장들’도 많다. 명백한 일방이다. 이러한 일방을 따르지 않으려 할 때는, 좀 강하게 표현하여, ‘너는 어른을 가르치려 하느냐?’, ‘어른이 한 마디 하면, 두 마디 하려 하느냐?’,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혹은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가르치고 억누른다.
직접 그러지는 않는다. 여러 색깔과 여러 강도로 알게 모르게 그런 ‘식’이다.
아랫사람은 입은 있어도 말은 없어야 한다는 ‘재하자유구무언’이란 말은,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사회의 도처에 포진하고 있다. 아랫사람이 말을 못하게 하는 또렷한 예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나의 방식으로’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지지하고, 실천하는 데에 익숙하다.
이는 한국사회의 불통문화 크기를 잘 말해 준다. 이는 나이나 지위, 재산 등 ‘외적 크기’에서 큰 윗사람과의 만남에서 아랫사람은 말을 않거나 적게 하는 것이 예의 혹은 미덕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실전’에서는 윗사람이 말할 때, 공손히 듣고 말대답하지 말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잘 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은 있는 입이 없는 입으로 ‘없는 듯 있어야’ 함의 문제다.
‘나 누구인지 알아?’, ‘너 누구냐?’ 하고 묻는다. 너의 상대 나, 나의 상대 너가 ‘누구’인지가 만남의 모습을 정함에서 아주 중요하다.
내가 누구라는 것이 밝혀지면, ‘너보다 큰 나’에게 ‘작은 너’도 같이 큰 혹은 더 큰 ‘그런 언행은 감히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나 때문이든, ‘양심’ 때문이든, 법 때문이든... 사리나 논리가 옳고 그름, 기고 아님을 정하지 않고 나이나 지위, 세력, 관습이 이를 정한다. 서로 누구인지의 ‘앎’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써 앞으로의 ‘함(행함)’이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윗사람들의 앞에서 사람들이 위축(萎縮)되고 ‘작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야 되는 말이 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상하게’ 말이 안 나온다. 말하는 입이 굳어 말 못 하는 입으로 된다. 굳이 유구무언을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들 스스로도 경험했을 것이고 남들에게서도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상함’은 어떤 모습일까? 왜 그런 모습이며 그 이상함의 효과는 무엇일까? 언뜻 보기에는 이상하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덜 혹은 안 이상하다. 보이지 않으며 말해지지는 않지만, 말을 못 하게 하는 외적, 내적 압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 물을 문제다. 그리고 계속 풀을 문제다.
드는 예가 너무 또렷하면, 약간은 ‘과장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렷하게 드러나는 모습과 희미해 잘 안 보이는 모습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이지, 그 기본논리는 같은 것이다. 이럴 때는, 또렷한 논리를 보이는 것이 보이는 자와 보는 자 모두에게 유리하다고 할 것이다.
관련된 모든 현상을 다 거론할 수도 거론할 필요도 없다.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예를 또렷하게 분석하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묻되, 그 문제들에서 우연적이고 반복적인 측면들을 사상(捨象)하며 추상(抽象)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런 추상화 작업을 통하여, 유사한 종류의 사물들과 현상들을 구분하고 분류하면서, 새로운 개념이나 판단들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삶의 현실을 더 묻고 드러내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우연과 본질을 나눔에 그리고 구분과 분류에 자의가 끼어듦은 늘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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