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무장독립운동 전두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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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장군은 1888년에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본명은 지석규(池錫奎) 또는 지대형(池大亨)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지청천으로 바꾸었다. 그의 집안은 조선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다.
지청천은 19세가 되던 1907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미 일제가 조선 군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뒤여서 군인 양성소인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1909년에 폐교 조치가 내려지면서 지청천을 비롯한 40여 명의 육군무관학교 학생들은 일본의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다 1910년에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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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로 3·1운동 이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이후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이 커다란 승전보 없이 이념과 주도권 싸움으로 보였지만 지청천을 비롯한 많은 독립투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항일 활동을 전개했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국내외 많은 한인들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나름의 성과를 달성하게 된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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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독립하자 광복군은 해체되었고 지청천은 1947년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한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광복군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지만 연합군이 광복군을 교전단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청천은 귀국 후 이승만 정권 함께 대동청년단을 결성해 활동하게 되고, 이때부터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으로서 그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재선의원이 되었으며, 1951년 이후에는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대한 군인유가족 회장,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반공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간다.
그는 1957년에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 : 정상규의 독립운동 어플, 다음 백과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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