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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24)

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위의 입만이 입이다 - 10 ~ 20kg 

우리사회는 나이를 매우 민감하게 나눈다. 어떤 때는, 마치 다른 중요한 것들을 다 잃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나와 남의 나이를 민감하게 나누며 따진다. 나이는 사회적 지위와 함께 위아래 관계의 원형(archetype)이라 할 것이다. 우리사회의 수직질서를 더 묻고 더 보기 위해서, 나이의 수직질서가 다양한 방식으로 간섭하고 간섭당하는 문제들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입학이나 입사, 입대한 때의 순서로 나이의 질서가 교란당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나이 적은 선배와 나이 많은 후배, 동년의 선후배 혹은 이년(異年)의 동급생이나 동기(同期)가 만날 때, 알력이나 싸움이 암암리에 혹은 가시적으로 일어난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나이 많은 후배들이 나이 어린 선배들의 예의 없는 행동에 화를 내는 일에 ‘일본에서 나이를 둘러싼 갈등이란 들은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다.’고 하면서 신기해했다.

어느 대학의 어느 과에서 앞으로 나이와 학년에서 모두 위인 학우에게는 ‘선배님’이라 부르고, 나이가 어린데 학년이 위인 학우에게는 ‘선배’라고 부를 것, 나이가 많은데 학년이 아래인 학우에게는 ‘후배님’이라 하고, 나이와 학년이 아래인 학우에게는 ‘후배’라고만 부를 것이라고 발표한 대책을 그는 한 일간지에서 소개한다. 수직의 서열을 재는 자들이 서로 충돌해 발생하는 현상이다.

세상에 먼저 들어-왔느냐 학교에 먼저 들어-왔느냐에서 어떤 먼저가 먼저냐고 왜 자꾸 따질까?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사고나 정서, 가치의 틀인 ‘에피스테메’가 답일까? 일본이나 독일, 한국의 틀이 다르고, 한국 안에서도 지역이나 나이, 계층, 종교, 성(性) 혹은 성(姓) 등이 에피스테메를 더 가른다.

한 집단의 안과 밖을 경계로 하여, 나이의 비중을 재는 자가 바뀔 수 있다. 경계는 만남의 방식에 변화를 발생시킨다. 한 조직의 안에서는 지위에 무게가 실리지만, 밖에서는 나이에 무게가 실리게 되어, 서열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한 조직 안의 질서가 그 조직 밖에까지 쉽게 연장되지는 않는다. 만남의 장이 한 조직의 안에서 밖으로 변할 때, 지위에서 ‘큰 사람’이 나이에서 ‘큰 사람’에게 ‘회사 밖이니까 말 놓으세요!’라고도 한다.

군대라는 조직 내에서도 나이크기와 계급크기 사이의 대립이 보이게 안 보이게 일어난다. 군대 밖의 ‘민간나이’가 군대의 경계선을 넘어 들어가려 해도, ‘군대나이’가 군대의 경계선을 넘어 나오려 해도 안 된다. 넘으면 ‘불법’(不法)?

그리하여 군대 안에서는, 나이에서 위이지만 계급에서 아래인 사람에게 반말을 하다가 만남의 공간이 바뀌어 군대 밖이 되었을 때, 공간과 상황이 바뀐 것도 잊고 군대의 ‘경계선을 연장’하여 계속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다가, 이내 변화된 상황에 맞는 나이를 ‘다시 감안’하기도 한다.

높게 평가받는 검사의 지위는, 사법의 공간 안에서 피의자한테 쉽게 하대를 한다. 사법의 공간 안에서는 피의자의 나이뿐만 아니라 지위도 해체되기 쉽다. 취조실 안에서는 나이가 거의 무력해진다.

그리 머지않은 옛날에는 의사도 병원 내에서 자신을 자신이게끔 만들어주는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비슷했었다. 사법공간이나 병원이라도 밖의 지위가 ‘유난히 높은’ 사람들의 나이는 쉽게 해체 당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나이의 예(禮)는 만남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며 예민하게 만들고 부담스럽게 한다. 여기에 ‘예 사회화’의 유교전통이 강하게 들어 있다. 나이가 사람들을 나누고 가른다. 아니, 사람들이 나이를 나누고 가른다. 나이를 위아래로 가르면서 상하를 정하고, 이에 상응하여 ‘서열대로’ 대우하고 대우받는 ‘무리 없는 만남’은 다양한 방법과 목적의 권력전략이 끼어드는 것을 허용한다.

어찌 보면, 나이의 크기에 따라 공(空)-연히 위아래를 나눈 다음, 이에 따라 서로를 다르게 만나는 규칙들을 정해 놓고, 이들을 지키고 관리하면서 긴장하고 기분 나빠하며 어려워한다.

이것은 마치 한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나오는 것 없이’ 각각 10 ~ 20kg의 무거운 바위 돌을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10, 어떤 사람들은 20... 말 그대로 부담(負擔)이다. 그러니,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나오는 것이 있기는 하다. 잘 보이지는 않는 짐이지만, 이런 짐을 지고 사는 삶을 자발적인 현대판 노예생활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부담의 맥락에서 ‘고대 노예’와 ‘현대 노예’의 동이를 꼼꼼히 비교하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 

물론, 장유유서라는 나이의 서열논리에서 기분 좋아 하는 쪽도 있고 기분 좋아 하는 때도 있으며, 사회통합이 촉진되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의 ‘기분 좋음’ 내지 ‘사회통합’이냐에 있다 할 것이다. 그 방식이 기본적으로 수직주의라는 것과, 이로부터 파생하는 ‘쓸모없는’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부담들과 갈등들이 문제라 할 것이다.

수직주의 혹은 ‘헛수고’와 자유, 평등, 다원성, 연대, 민주, 합리 등의 근대 가치가 공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수직적 나이질서의 재생산 논리는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다른 수직주의의 재생산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계속 물을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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