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권력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의 전개와 중심 인물들에 대한 고찰
1925년 4월, 조만식은 경성에서 보천교 부인 선포사 박자혜(朴慈惠)와 만나 소개장을 얻은 후, 보천교 본소의 북(北)방주 한규숙(韓圭淑)을 방문했다. 식민권력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만식은 보천교도로 경성보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와 평양재판소에서 서기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경성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왕래하며 항상 조선독립운동에 참여·획책해 온 자”였다. 또 박자혜는 신채호의 부인이다.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産婆)일을 하면서 의열단 등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할 때 거사를 돕고 있었다. 그리고 선포사는 보천교의 지방조직인 정교부(正敎部)에 소속된 간부를 말한다.
아무튼 신채호의 부인이었던 박자혜가 보천교와 만주의 정의부를 연결시켜 준다. 여기서 조만식은 박자혜를 통해 한규숙을 소개받은 것이다. 그리고 한규숙을 만난 자리에서, 조만식은 장래 보천교의 발전은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하는 데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차월곡도 이때 조만식으로부터 당시의 만주 및 국내의 상황을 듣게 된다. 그리고는 이런 시국에 보천교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물었다. 이에 조만식은 국내에서 사업을 해도 어렵고, 보천교에서 만주에 생산기관을 조직하여 교도들을 이주시켜 민족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고, 보천교로 하여금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결·지원을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제안했다.
결국 보천교의 주요 간부들과 의논한 결과, ‘보천교는 재외 독립운동을 후원할 것, 그 방법으로 만주에서 개척사업을 일으켜 생활이 곤란한 보천교도들을 이동시켜서 생산기관을 조직하고 그 이익금을 독립단에 제공할 것, 이를 위하여 소요되는 자본 약 30만원을 보천교가 지출할 것, 보천교는 군자금 모집에 협조할 것’ 등이 협의되었다. 이런 내용으로 협정을 맺은 뒤에, 6월경에 이춘배(李春培)가 본소에서 여비 300원을 조달받고 봉천(奉天)으로 파견되었다.
이춘배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 역시 보천교도였으며, 1914년부터 장형(張炯 1889-1964. 단국대학 설립자)과 함께 만주지역을 무대로 무기구입과 군자금 조달 등 특무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당시 정의부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보천교와 정의부를 연결했던 것이다. 이춘배는 봉천에서 정찬규(鄭贊奎)를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정찬규는 통의부(統義府) 민사부장의 비서였고, 상해임시정부와도 교분이 깊었다.
그는 “1914년 경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서 약 3년간 재학하며 일본에 약 6년 동안 체류하다가 귀국한 후에는 오직 조선독립운동에만 뜻을 두고, 1919년 만주로 가서 정의부(당시의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김정관(金正寬)의 부하가 되어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여 온 자”였다.
이춘배를 만나 뒤, 정찬규는 정의부 참의 김정관과 상의한 결과 보천교와의 협정에 동의하고 정의부 군인 6명을 파견하기로 내정했다. 그리고는 ‘정의부 제4중대 임시특파원’이라는 직책을 받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권총 2정, 실탄 47발을 김정관으로부터 교부받아 휴대하여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이 군자금 모집계획은 비록 뜻한 바대로 성공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보천교가 재외 독립운동단체와 적극적으로 직접 연결되어 활동하려던 실체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도만으로도 그 의의는 자못 컸다. 특히 외관만 보고 보천교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자료들을 주의 깊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 보천교가 박자혜와 조만식 그리고 이춘배와 정찬규를 통해 만주의 정의부와 연결되었을까를 찬찬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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