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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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
죽어 살아라 - 이런 데서 일하는 주제에
미리 말한다. ‘아직도 남존여비 질서가 있나? 갑갑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군!’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없다면, 이 땅에 페미니즘 운동은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왜 존재할까? 여성부는 왜 생길까? 그리고 한국 밖에서 발표되는 한국의 낮은 성 평등 순위는 무엇을 말해줄까?
더 중요한 것은, 직접적으로 보이는 남존여비만이 남존(男尊)이고 여비(女卑)인가? 그리 녹록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직접’ 남존여비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졌을 수 있다. 그러나 ‘온 사람’이기에 반(反)하며 ‘반(半) 사람’이기를 용인하고 바라는 ‘남존여비-적’인 태도는 안 보이게 작용하기도 하며, 약화되어 잔존하기도 하며, 다른 위아래 간의 논리에서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서 강화되기도 한다.
남존이든 여존이든, 이 땅의 다양한 모습의 비민주적 존비(尊卑)질서 내지 수직주의 자체가 우리들이 되돌아보고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닌가? 앞에서의 나이 논리도 이런 관점에서 묻지 않았던가?
‘이런데서 일하는 주제에!’라고 하면서 어떤 아저씨들은 음식점 여종업원의 팔을 억지로 잡아당긴다. 이런데서 일하는 주제에? 왜 ‘이런데’인데? 급여가 적어서? 지위가 낮아서? 급여가 적고 지위가 낮은 것도 서러운데...
그게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서? 지불될 수 있는 돈 크기의 횡포일까? 하나의 성이 또 하나의 성에 대해 부리는 횡포일까? 갑질이 ‘강자의 약자에 대한 함부로’라면, 일종의 갑질일까? 물론이다. 자신도 여성의 아들이고 여성의 아빠이고 여성의 남편일 텐데... 그러니 나 중심주의다. ‘내가 하면 로맨스,남이 하면 불륜’?
혹시 ‘별 일’도 아닌데, 괜히 횡포라 하는 호들갑은 아닐까? 가해자에겐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아니, 별 일이지만 전혀 모를 수도 있겠지... 여성 손님들도 남종업원들을, 아니, 그냥 여종업원들이라도 이렇게 대할까? 이렇게 대하지 않는 여성 손님들은 착해서일까? 혹은 지갑이 얇아서? 남편의 지위가 충분히 높지는 못해서? 그러는 것이 ‘여성-적’이지 못해서? 그래서 ‘참 여성적’이어서?
어쨌든, 이런 횡포는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결코 아니다. 이는 상대가 ‘작은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이라서 행해지는 과시와 무시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존여비의 기초를 묻고 분석함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갑질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수직주의의 모습들을 묻고 그 기초논리를 드러내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현실을 과장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시어머니들도 많다.
드라마에서만이 아니다. 직계존속을 학대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대를 훨씬 넘어 살해까지도 불사한다. 동방예의지국인가? 아닌 것 같다. 서양에서 좀 살아보니, 서양 사람들이 예의를 더 아는 것 같다. ‘서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나올 것도 같다. 세상크기와 무관한 사람크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사람크기가 세상크기를 키우는 측면도 있다.
예의를 말한다 해서, 오해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예의는 과거 신분제 시대의 누르고 눌리는 억압이나 불편, 허식이기 쉬운 예의가 아니다. 여기서의 예의는 오히려 사람들의 ‘외적 크기’에 상관없이 서로를 같은 사람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도 자유롭고 편안한 만남과 소통의 열린 방법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같은’ 사람들로 만나고 소통하는 방법이다.
이런 만남과 소통에서는 ‘함부로’는 걸림돌이므로, 보다 ‘합리적인 함께’, 보다 ‘민주적인 함께’를 하나의 방식으로 함께 모색해 갈 수밖에 없다. 드라마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위아래의 자리만 바뀌었을 뿐, 누르고 눌리며 불편하고 부당한 수직주의는 여전하다. 행동주체의 자리만이 바뀌었을 뿐, 수직주의적 만남과 소통의 방식은 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바뀐 자리도 마찬가지다.
낮아진 여성의 높이를 들어 올리는 관점이라 하여 여성들이 너무 좋아 할 필요도 없다. 여성이 상위로 즉, 위 자리로 되어 수직을 행사한다면 도로 도로(徒勞)이기 때문이다. 누르고 눌리며 불편하고 부당한 수직주의를 지양하고 ‘수평적인 함께’를 지향함이지, 결코 여성 자체가 위 자리로 향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수직주의 자체를 묻는 것이지, 결코 어떤 수직주의냐를 묻는 것이 아닐 테니까...
성차별은 50%의 사람들 문제다. 아니, 조금 넓히면 100%의 문제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수직주의적 만남과 소통의 방식은 각각의 영역에서 각각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은 아랫사람이기도 하여 ‘일종의 여자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 위에는 또 다른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아, 눈치 보는, 불안한, 그래서 아래인 면도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동시에 ‘일종의 여자 사람’이라면, 그녀는 일종의 ‘이중 여자’ 내지 ‘이중 아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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