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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봉 박사의 『한옥과 구들』 - 온돌온실이야기 (2)

온돌온실이야기 (2)

 

한국현대한옥학회 회장 김준봉

 

 

 

 

 

 

 

15세기 초, 조선에는 구들과 창호지 그리고 흙벽과 짚을 이용한 온실이 있었다.

조선시대 온실은 산가요록의 편찬연대를 그가 편찬에 가담한 의방류취[醫方類聚](1445)와 유사한 시기로 본다면 대략 1450(세종 32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화란의 무이젠버그가 쓴 온실의 역사(history of green house)를 보면 유럽에서는 1619년경이며 난로(stove)로 가온하였다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조선 전순의의 온실은 이보다 약 170여 년경 정도 앞선 것으로 과학적인 온실로 평가되고 있다. 

이 조선온실은 조선 초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기록대로 2002년에 복원한 것으로, 1450년 의관(醫官) 전순의(全楯義)선생이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기록된 온실건축부분의 기록대로 당시 궁중의 꽃과 정원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했던 500년 전의 옛 온실건축을 재현하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산가요록의 자료를 살펴보면 산가요록의 식품부분 중간에 동절양채(冬節養菜)라는 작은 제목이 있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집(온실)을 짓되 크고 작음은 임의대로 한다. 삼면은 막아 쌓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남면은 전면에 살창을 내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바닥에 구들을 만들되 연기가 나지 않게 한다. 그들 위에 흙을 한자반 정도의 높이로 쌓고 온갖 봄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고 밤에는 덮개를 덮어주고 날씨가 따뜻하면 철거하고 매일 물을 이슬같이 뿌려준다.

방안은 항상 온화하고 윤기가 있게 하며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또 이르기를 밖에 가마솥을 걸어 조석으로 솥에서 나는 습기를 벽안으로 끌어 방안을 훈훈하게 한다.” 고 기록했다.

이 산가요록의 기록을 통해 15세기 초에 이미 조선에 구들과. 창호지 그리고 흙벽과 짚을 이용한 온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또한 그 방식이 온돌과 창호지를 이용하여 온실의 3요소인 난방. 가습. 채광의 기능을 두루 갖춘 현대의 첨단 온실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발전된 형태라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전통구들의 원리를 이용하여 온실내 흙의 온도를 유지하였다

특히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조동우 박사팀은 복원당시 식물이 생장할 수 있는 기능과 환경을 갖출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복원된 조선온실에서의 열환경 특성을 측정 분석하고, 또한 한지온실과 비닐온실의 축소모형을 제작하여 이에 대한 열환경 특성의 차이를 비교 비교 분석하여 쓴 논문인 “조선온실건축에 이용된 온돌의 독창성과 과학성”(국제온돌학회 학술논문집)에서 한지온실이 일사가 실내로 투과되어 실내온도를 상승시키고 식생이 성장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면서 보온을 하는 온실로서의 기능을 뚜렷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또한 한지는 통기성(공기 및 수분 투과성), 유연한 접힘, 강인성 및 빠른 흡수성, 그리고 보온성 등이 비닐에 비하여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나 현재의 비닐온실과 조선시대의 한지온실에 대한 온열환경성능을 비교해 본 결과, 조선시대의 온실이 오늘날의 온실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첨단 영농시설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한 겨울에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생산케 한 방법이 온돌온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 건축물은 기능면에서 오늘날의 온실과 일치한다. 한 겨울 푸른 채소가 없는 계절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생산케 한 방법이 바로 온돌온실이다. 이 온실은 온돌의 열기와 창호지의 온실효과로 겨울에도 화초를 길렀던 빛을 투과하면서도 보온효과가 탁월한 한지와 황토흑벽과 온돌을이용한 단열 지중 난방, 실낸 온습도 조절은 실로 과학적이다.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움집(土宇)과는 가온(加溫)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별이 되나 때로는 움집과 혼용하기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종 7년(1552) 1월 12일자의 실록을 보면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役事)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린다.” 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곧 움집이 가온을 하지 않았다면 시복에 대한 언급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종 20년(1428)5월 27일 “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상언(上言)하기를, ……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造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그 귤나무의 길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 쓰는 긴 나무도 준비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몹시 곤란을 겪는다 하옵니다. - 『세종실록 제81권』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온돌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흙벽온실은 3면을 흙담으로 쌓고 지붕만 비닐을 씌운 온실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시골에서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사라지고 없다. 중국 산둥(山東)성등과 동북지역인 요녕성 심양시과 길림성 등지에서 유사한 형태를 발견했지만 바닥에 구들을 깔고 온돌과 가마솥 수증기로 가온을 한 온실은 조선의 온실이 유일하다.

가마솥을 이용한 온기발생장치

현재는 2002년 당시 복원된 온실이 굴뚝도 한 개가 없어지고 아궁이와 고래가 파손되어 전혀 불을 땔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아쉽다.

 

글쓴이 : 한국현대한옥학회 회장 김준봉, (북경공업대학교 건축도시공학부 교수, 건축사)

 

지승용 기자  jsr68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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