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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29)

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죽어 살아라 - 각자 제자리로
작은 사람을 ‘반사람’(半-)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半) 50%와 반(伴)하면서 살 사람들이 이 50%에 의해 ‘반사람’(半-)으로 낙인찍힌다. ‘불로 지지는 도장’ 낙인(烙印)을 찍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낙인찍히는 자들 가까이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낙인찍히는 자들도 함께 낙인찍는다. 이런 ‘함께 낙인’의 논리가 ‘이론적’으로 중요하다. ‘실천적’으로 중요하니까...

또, ‘귀머거리 삼년’은 삼년간 듣지 마라가 아니라, 못 들은 척 하라는 뜻이다. 위에서 말씀하시는데, 안 들으면 오히려 큰일이다. 듣기는 듣되, 안 들은 것으로 하라는 뜻이다. ‘말씀’을 들었지만, 안 들은 걸로 하라는 것은 말씀대로 따라 하고 다른 생각과 판단이 있어도, 이의를 달지 말고 ‘그냥 동의’하라는 뜻이다. ‘그냥-듣기-만’ 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벙어리 삼년’이 ‘귀머거리 삼년’과 함께한다.

가정에서 목소리를 작게 하거나 아예 내지 말라는 것은, 이해문제의 힘 갈등에서 자신의 관심을 주장하지 말고, 눌러 ‘작게’ 혹은 ‘없게’ 하면서, 시어른이나 남편 등 윗사람들에게 ‘양보’하여 ‘조화’를 이루는 데에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하자는 혹은 참여하라는 뜻이다. 이는, 어찌 보면, ‘죽어 살아라!’는 뜻이다.

이렇게 울타리 있는 가정은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의 자신을 단속(團束)하기 위해, 여성의 입을 허(許)와 불허(不許)로 단속(斷續)한다. ‘단속’(團束)이란 모여 둥글게 뭉친 것(團)을 계속 동여매어 하나로 잡아매는 것(束)을 의미하며, ‘단속’(斷續)이란 끊었다(斷) 이었다(續)를 반복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성이 입으로 자신의 호오나 관심을 목소리 크기에서나 발언주제에서 유감(遺憾)없이 밖으로 드러낼 때,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기존의 ‘성차별적 함께’의 질서는 침해당할 수 있다. 이는 시부모와 남편 위주의 발상이다. 위주(爲主)는 ‘주인 되기’, ‘중심되기’, ‘위되기’, ‘먼저 되기’를 말한다. 그 주(主)님의 상대는 객(客)이거나 신하이거나 ‘변두리 사람’이거나 ‘나중 사람’이다.

가정에서 둘레를 막아 만든 경계선으로서의 울(柵)은 울 밖을 ‘안 들이는’ 기능도 하지만, 울 안을 ‘안 내는’ 기능도 한다. 울을 경계로 하여 가정에 인적 물적 나들이가 통제된다. 울로 모두 가두면 울 안의 삶 자체가 저지당하므로, 울에 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는 장치를 만들어 소통하되, 그 출입자와 출입물을 단속(斷續)한다. 막아 놓되 위의 필요에 따라 여는 이 ‘열음 속 막음’ 내지는 ‘막음 속 열음’의 ‘울’ 장치는 위에게 ‘나쁜 자연’, ‘나쁜 인간’ 그리하여 ‘나쁜 만남’을 막아낸다.

이렇게 울은 일정한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일정하게 조직하고 관리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이런 울이나 이를 열고 닫는 문은 도덕이나 법과 많이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하여 여자의 행동이 정해진 경계선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할 때, 이 경계선은 이처럼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 양자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여성이 자신 ‘안’의 의사를 자신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할 때, 그러려는 자신의 의지도 일종의 울로 기능한다.

그러나 하나의 울로서의 ‘자신의 의지’는 결국 또 하나의 울인 ‘가정’의 질서가 빚어낸 효과라 볼 수 있다. ‘편안 안’ 자(安)도, 여자(女)가 집이라는 경계선 안에 머물러야 편안, 평화, 안정이 보장된다는 ‘사실’ 혹은 ‘당위’의 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에 과부가 수절하면 ‘매서운 여자’ 열녀(烈女)가 된다. 사람들은 - 혹은 남자들은 - 그녀를 치켜세우고 열녀문으로 칭찬해준다. 떠밀려 혹은 내면화되어 자발적으로 ‘온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진정한 인간’이라 하면서 박수치고 상주고 길이 기린다.

이를 길이 기리는 사람들은 실은 대부분 정숙하지 못할 때가 많다. 혹시 정숙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한 기림은 아닐까? 가림의 기림? 그러면서도 경우에 따라선 아무개가 ‘룸 사롱에 갔는지 안 갔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물어진다.

같은 성욕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떤 쪽이 채우려면 못됐다고 하고, 어떤 쪽이 채우려면 묵인하거나 당연하다고 하거나 능력 있다고 한다. 같은 사람들이고 같은 성욕인데... 혹시 ‘다른 같음’이라서?

선악, 시비, 정사를 내세우는 논리의 뒤에 불선(不善)하고 부당(不當)한 힘 관계, 이해관계가 쉽게 숨을 수 있다. 그렇다고 선악, 시비, 정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를 말하느냐가 문제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다 사람’, ‘더 사람’, ‘다 함께’, ‘더 함께’가 - 예를 들어 - 답일 수 있다.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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