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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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의 말이다. 그는 광복을 맞아 정읍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면서 정읍에 고마움을 위와 같이 드러냈다. 이는 우담 서상기(徐相基) 선생이 보천교 연구가인 안후상 선생과 대담하면서 구술한 내용이다. 서상기 선생은 탄허 스님의 상좌로 스님을 가까이 모시다가 그의 사위가 된 분이다. 탄허 스님은 누구인가? 주지하다시피 그는 속명이 김택성(金宅成)으로 보천교의 목(木)방주였던 김홍규(金洪奎)의 자제(子弟)이다.
김홍규는 차월곡의 교단 형성 초기부터 많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1916년 교단조직을 처음 만들 때 24방주가 되었다가, 1919년 다시 60방주제로 재편할 때 목방주에 임명되었다. 보천교는 본부에 교주 바로 밑에 교주를 보좌하는 사정방위(四正方位), 곧 금·목·수·화방주 4명을 두고 있었다. 김홍규는 그중 목방주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당시 보천교의 모든 교금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만큼 차월곡의 신뢰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탄허 스님은 김제 만경에 살다가 이러한 부모를 따라 대흥리로 이사했다. 그리고는 보천교 본전의 동쪽 편에 살았고, 이때 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바로 그를 모셨고 또 사위였던 서상기 선생이 탄허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1945년, 김구 선생이 정읍을 방문해 태인의 김부곤(金富坤) 선생 댁에 머물렀으며 이 때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김구 주석이 정읍에 빚을 운운했을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대해 정읍지역이 기여한 고마움의 뜻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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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정읍지역이 임시정부에 기여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정읍출신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라용균(羅容均)이나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백정기(白貞基) 의사 등의 공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까? 그것도 분명 일리가 있겠지만, 그보다 정읍에 근거를 두었던 보천교가 상해임시정부와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기여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보천교는 상해 임시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일까? 1919년 3·1운동 이후인 4월 13일,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설립 초기부터 심각한 자금부족과 인력부족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인력난과 열악한 재정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그중 하나가 국내에서 자금을 모금하는 방안이었다. 따라서 당시 국내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자금력을 가진 보천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실탄은 곧 사람과 군자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식민권력의 보고서(‘상해 불령선인의 근황에 관한 건,’ 1925)는 이러한 임시정부의 상황과 보천교의 연계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상해임시정부의 간부로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김구(金九) 등은 현 조선총독부에 반대하고 이에 대항하여 최근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하여 저들은 □□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훔치교’ 교주 차경석이 교재(敎財) 수 백 만원과 수 백 만의 신도를 가져 근래 총독부 관헌의 압박 □□ 해외 도항(渡航)을 지망(志望)함으로써 □□ 각지 독립단을 통일시키려고 □□.”
보천교, 인적·물적으로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1921년 11월 11일부터 개막되는 워싱턴회의를 앞두고 임시정부는 여기에 파견할 한국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대(對)태평양회의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진로를 모색하려 개최했던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 3인이 참석했고, 여기에 참석했던 3인 중 배치문과 강홍렬은 이후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등 다양한 인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보천교의 기여는 인적 자원의 제공도 중요했지만 물적인 독립자금 제공이었을 것이다. 만약 보천교의 자금이 이미 제공되지 않았다면 국민대표회의 참가는 어려웠을 수밖에 없고, 임시정부가 조직한 외교후원회에 대표파견도 힘들었다고 보인다. 이는 이미 임시정부에 어느 정도 자금에 제공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추정함이 당연하다.
실제로 1921년, 탄허 스님의 부친이자 보천교의 교금을 총괄했던 김홍규가 독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교금 30만원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 김구에게 보냈고, 10만원 가량을 항아리에 넣어 마루 밑에 묻어 놓았다가 밀고로 발각되어 압수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922년 1월에는 제1회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 참가한 사회주의운동가들(김철수, 김규식, 장덕수, 최팔용, 여운형, 라용균, 장덕수 등)에게 차월곡이 여비를 지원한 사실도 있었다. 또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49인 중 1인이자 보천교 경성진정원 형평사장이었던 임규(林圭)가 보천교로부터 5만원을 받아서 라용균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임시정부에 대한 보천교의 자금지원을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뿐만 아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책으로 활동하던 이중성(李重盛)도 김구 주석으로부터 보천교의 인적·물적 역량을 독립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협의하라는 밀명을 받고 1928년 5월 국내로 잠입하여 차월곡을 만났다. 차월곡은 이에 이중성을 수호사장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호응했으나, 이중성이 보천교를 탈퇴하고 별도의 교단을 운영하여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을 보더라도 보천교 관련 건수가 중복된 건수를 제외하면 총 321건으로 확인되고,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도 보천교의 항일 기사 건수가 총 147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전체 항일기사의 54.2%를 차지하는 비율로 기성종교에 비해 훨씬 많은 건수이다. 그리고 보천교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10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도 그렇다. 이런 지표들도 모두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항일의식을 나타내는 내용들이다.
보천교는 이렇듯 상해임시정부의 활동들을 도우며 함께 민족의 독립을 지향함으로써, 김구 주석이 고마움을 드러냈던 것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모르는 역사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그건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할 뿐이다.
- 이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엮어본 보천교 칼럼의 연재를 마친다.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와 관련해서는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들은 추후 단행본을 간행하여 마저 전하고자 한다. 다만 본 칼럼을 통해 보천교에 드리워진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부정적 시선을 걷어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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