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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립운동가 이명하 선생(1878.1.23.~1921.2.2) 서거일

"일본인이 조선 관리를 간섭하다니?"

관직 박차고 무장항일의 길에 일생을...

남아가 이미 신하된 몸으로 나라의 원수를 아직 갚지 못하고, 백성의 원한을 갚지 못하였으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죽어도 한이 남는지라 풀려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니 속히 죽여 달라.

-선생의 공술 중에서(《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 11일자) -

이명하 선생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초명은 이주윤(李柱允)이며 자는 우문(又文) 그리고 호는 몽학(夢鶴)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왕실의 후예로 태어났으며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며 독립운동가였다. 이명하 선생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한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생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성균관에서 신구학문을 두루 접하며 근대지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주요 관직을 맡게 되고 이어 근대학교를 세워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891년 성균관진사를 지냈으며 1896년부터는 유인석을 도와 의병과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잃어버린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1907년에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전을 전개했고 1910년에는 나라를 읽게 되자 서간도록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경신대토벌’이라는 작전으로 인해 서간도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결국 교통의 요충지인 중국 안동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한편 이곳에서 일제의 경찰들과 격전을 벌이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일본은 영사관과 소속 경찰대를 총출동시켜 독립군들을 추격하게 된다. 결국 치열한 교전이 벌여졌으며 이 전투에서 15명의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이명하 선생은 순국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출처 : 정상규의 독립운동가 앱과 일부 포털 공개 정보 인용 -

 

박하영 기자  p-hayoung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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