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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33)

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따라다니는 따돌림 왕따 - 무전(無全)유죄

이 땅에서 장애인들도 같이 ‘사람’이기 어렵다. 생각이 더 닫혀있던 예전엔 더 그랬다. ‘별꼴’이고 ‘이상한 사람’이고,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 내지 하나의 ‘반쪽 사람’ 쯤으로 만나지고 대해졌다.

아니, 만남의 대상이 아니라, 피함의 대상이었다. 우연히라도 만나면 피함으로 대해졌다. 일종의 왕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사람’이라고 ‘가외로’(加外-) 말해야 한다. ‘우리도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가외로 말해야 한다. 그나마도 주변에서 말할 기회를 별로 안 준다. 입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조차도 기회를 안 준다. 이런 생각이나 정서, 문화에 길들어져 스스로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왠지 스스로도 가외로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가 피하는지 모를 정도다. 서로 ‘알아서’ 피하는 것 같다.

부모들은 자식이 이런 장애인과 같이 있을까봐 걱정한다. ‘뭣도 모르고’ 같이 있으면 떼어 놓는다. 공부 잘하거나 부자 집 자녀들만 골라 만나라 하는 가운데, 가난한 집 자녀나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도 기피의 대상이 되듯이...

널리 기피되는 속에 밥벌이의 길도 막힌다. 일은 할 수 있어도,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선 기본적으로, 안 그런다.놀러온 장애인 친구를 자녀가 차별해도, 부모는 그런 차별의 부당함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밥벌이의 길도 많이 열려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장애인들은 많이 숨어 살아야 했고, ‘죄 없이 죄의식 속에’ 살아야 했다. ‘법의 그물(罒)로 잡아내야 할 잘못(非)’이 죄(罪)다. 사람이지만 그냥 사람으로 대해지지 않듯이, 무죄이지만 유죄인 셈이다. 무전(無錢)유죄가 아니라, 무전(無全)유죄다.

남들이 자신들을 떼어내듯, 남들의 영향을 받아 이제는 남들처럼 생각하는 자신들도 자신들을 밀어낸다. 자신들이 스스로를 밀어냄은 떼어-냄이 아닐 듯... ‘떼어-들임’일까? 이렇게 장애 있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겉-도는, 따로-도는, 따로-노는 ‘비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이제 차별금지법도 생기고 보는 눈길, 가는 손길도 상대적으로는 많이 우호적으로 변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어느 정도는 ‘더 사람’으로 되었지만, 정도의 차이이지 여전히 비-보통의 사람들로 대해진다.

못 보는, 못 듣는, 걷지 못하는, 말 못하는 장애가 분명히 있다.이들에게 이런 면에서 평균과 약간 다른 성질들이 있다. 그러나 보통의 이른바 ‘정상인’이라는 사람들을 좀 더 들여다보면,그들 또한 수많은 장애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도 여러 장애들이 있다.

자기에 혹은 외물에 갇혀 다른 것을 못 보고 못 느끼고 못 들으며 말할 줄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 ‘못함’의 방식이 약간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를 장애라고 불러오지 않아왔을 따름이다. 정상과 보통, 평균의 이름 속에 획일과 폭력, 배제가 쉽게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왜 ‘정상인’도 장애인인데, 장애인이라 불리는 자들에게만 장애인의 이름표를 붙일까? 왜 ‘장애인’도 정상인인데, 정상인이라 불리는 자들에게만 정상인의 이름표를 붙일까? 누가 이런 이름표를 자꾸 붙일까? 작명소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이름 짓기, 이런 이름 붙이기가 일어나면, 그 이름에 상응하는 만남과 피함의 행동도 쉽게 일어난다. 일종의 언행일치일까?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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