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이하배 박사의 『갑질시대 소통인문학』 '따로 함께'의 시대에 '더 사람', '더 함께'를 말하다 (34)

만나자는 걸까, 피하자는 걸까?

 

이하배 (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자신의 뜻이 국민의 뜻이라네 - 고의 아닌 것처럼 고의로

뽑은 국민과 뽑힌 대표자들(representatives) 사이에도 말길이 많이 막혀 있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국민들은 이들을 불신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말을 듣지 않음은 자신이 국민에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자신에 따르라는 것이다.

이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국민이 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다른 요구나 관심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고, 겨우 말을 해도, 듣지 않는 독재(獨裁)는 옷감을 혼자 재고 자르는 일이라 했다.

예를 들어, 2012년은 국민들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을 뽑는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으며 2016년에는 총선이 있다. 선거철에는 선거의 후보자 되기와, 후보자가 된 후에는 유권자의 표를 많이 얻어내기가 정치를 하는 혹은 정치를 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다.

후보자가 되고 당선자가 되기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짓’은 다 하려 한다. 이 짓이 ‘겉-짓’이라도 불사한다. 루소(Rousseau, 1712~1778)는 ‘선생의 학생에 대한 단 하나의 드러난 거짓말은 교육의 전 성과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한다.

겉이 속과 다른 ‘겉-짓’인 거짓을 하여 높은 자리를 점하는 자가 되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법에 의해 다시 아래로 내려진다. 부끄러운 것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오히려 억울해 한다. 자신들도, 남들도 이 짓이 ‘그리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보다. 일단, 생각이 문제인 것 같다.

선거에서 조직과 말이 중요하다. 선거에서 말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겉으로 내-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2012년의 선거에서 최대 이슈 중의 하나는 소통, 특히 국민과의 소통이다. 그간 국민과 불통이었고, 국민과 따로였다는 뜻이다. 주권은 재민이라 하지만, 국민은 목소리 낼 곳도 없고, 내더라도 안 듣는다는 뜻이다. 가는 목소리가 차단되니, 오는 목소리도 하나의 방식으로 거부된다. 들어도 안 들리는 미약한 목소리인데, 그나마도 듣지 않으니, 들리고 만나고 소통하고 나누고 함께 하기는 글렀다.

주권재민에서 ‘민’은 국민일 텐데... ‘민’은 국민이 아니라, 그냥 민짜나 민둥산의 ‘민’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짧은 선거철에는 유권자이다가 선거 후엔 ‘무권자’로 바로 원위치 되는 국민을 ‘민-국민’이라 해도 놀랄 일은 아닐 듯하다. 선거철에도 말로만 유권자인 것 같다.

선거에서 자신을 부각(浮刻)시킬 때, 항상 기존의 구태정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큰 소리’로 내-세운다. 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기다!’라는 말이다. 나는 다르다, 새롭다, 좋다는 뜻이다. 과거와 다르고, 당 내외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이다. 하나도 다르지 않으면서 그런다. 어쩌다 한둘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부정적인 부분들이 바로 상쇄하여 ‘까먹는’ 다름일 뿐이다.

과거에도 주로 그랬다. 정치인들이 ‘새’ 자를 즐겨 쓰는 구태는 여전하다. ‘새로운 정치’란 ‘말’로 과거와 차별화하고 다른 정파와 차별화한다. 같은 당에서 후보로 뽑힐 때는 다른 예비후보자들과 자신을 차별화한다. 여기서 차별은, 예를 들어, 성차별, 인종차별에서처럼 ‘남들을 끌어내림’이 아니라, ‘나를 끌어올림’을 뜻한다. 같은 음의 말이 다른 의미를 가질 때도 많다.

말로는 문제들이 다 풀리는데, 뽑아 올려놓고 보니 실제로 풀린 문제는 별로 없다. 부분적으로는 문제를 풀어도, 이는 다시 다른 문제를 수반하는 풀음이다. 예를 들어, ‘경제 대통령’, ‘국민을 잘 살게 하는 대통령’을 내세워서 뽑아주었더니, 조작 가능한 통계에서는 몰라도, 실제의 서민가계는 더 악화된다.

보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나머지는 공격적으로까지 침묵할 수 있는 통계는 하나의 큰 권력이 됐다. 양극화가 계속 심화되는 속에 전체경제의 수치가 커진 것이 대부분의 민초 경제와는 무관하다. 엄밀히 말하면 무관할 수 없다. 민초들이 부지런히 노력했고, 이 노력이 결국은 전체 부의 근원일 테니까... 아니면, 원조 받은 부일까? 혹은 하늘에서 떨어진 부?

그러니 ‘99%’의 삶도 함께 배려하자는 경제민주화, 동반성장,서민복지 등을 후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당동성으로 그리고 동상이몽으로 이야기한다. 긴가민가하면서도 국민 귀에 쏙쏙 들어올 수 있는 ‘아름다운 말’들이다. ‘기’(其)인가 ‘미’(未)인가는 반은 ‘신’(信)하고 반은 ‘의’(疑)하게 됨을 말한다.

기와 미, 신과 의가 섞여 있으니 민으로서는 결정하기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왠지, 말과 명(名)은 기(其)인 것 같은데, 실(實)은 미(未)인 것 같아서다. ‘그들’은 이런 아름다운 말들을 서로 선점하려 노력하고, 좀 늦으면 ‘후점’이지만 약간 변형하여 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하는 자도 말 듣는 자도 모를 때가 많다. 모르는 것이 편할 수 있다. 모를 때, 잘 안 보일 때, 국민들이 더 잘 속을 수도 있다. 한 말, 한 약속을 실천하지 않음이 속임 아닐까? 그 방법이 속임이든 겉-짓이든, ‘잘 보여’, ‘잘 말해’ 뽑혀지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나는 되고 우리는 된다.

말로만 하는 것 같아 불안한지, 선거 때-만 되면 곳곳을 다니며 국민들을 만난다. 아니, 방방곡곡을 다 다닐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 것처럼 보일 수만 있으면 효험이 있으니까...

만날 땐, 가능하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만난다. 울면서 재래시장 할머니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아이들을 안아주며 장국밥을 먹는다. 그럴 때는 사진을 빼놓지 않고 꼭 찍어 전 국민들에게 알린다. 이 알림은 고의적인 알림이 아닌 것처럼 고의로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국밥이나 순대도 마음대로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못 갈 데’를 가서 박수갈채는커녕 계란만 맞고 돌아오기도 한다. 선진 선거문화일 리 없다. 뽑히는 일이 왜 이런 식일까? 왜 이런 식이어야 할까?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