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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규의 「잊혀진 영웅들」 '편강렬 선생' 편열여섯 살에 의병대장을 맡은 전설적인 의병장 (1892.2.28 ~ 1929.1.16)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전국 각지에서 “왜놈에게 복수를!”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선생은 1907년 선생의 고향인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장의 의병부대에서 소집장 및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습니다.

1년 후 전국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자 13개 도의 의병부대를 연합 결성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실행했으나 전투 중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16세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일경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최대한 활동을 숨기며 기회를 엿보다가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선생은 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랜 침묵을 깬 첫 번째 활동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 황해도 지부에서 활동을 벌였으나 총독암살 모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이때 끔찍한 고문을 당했지만 선생의 독립정신은 더욱 견고 해졌을 뿐입니다.

출옥 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소수정예의 결사대를 조직하고 치열한 항일전을 벌였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의 치열한 역사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에 의해 죽어간 우리 의병은 15만 명 정도이며,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이다.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멸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생의 이런 애국 활동은 의병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3·1만세시위가 일어납니다. 편강렬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했고, 3월15일부터 만세시위에 가담했습니다. 만세시위 이후 선생은 친동생 편덕렬 선생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 보냈으며, 황해도에서 동지들과 군사준비단을 조직하여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비상경계망을 내리고 검거 작전을 벌입니다.

이때 선생도 붙잡혀 1년 2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끔찍한 고문을 겪은 선생은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부인과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운영하던 점포는 채권자에게 전부 탈취당해 무일푼 신세였습니다. 선생은 이제 남은 것은 정신밖에 없다며 만주로 향합니다.

선생은 만주에서 양기탁 선생, 남정 선생 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하고 ‘의성단’ 단장이 됩니다. 만주를 무대로 펼친 ‘의성단’의 활동은 조선인의 열, 성, 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민들에게도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의성단원 수가 250명 정도였고, 전부 무장 훈련을 받아 국내에 진입할 준비까지 했던 것을 보면 그 규모나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의성단’의 이름으로 선생은 1924년 단원들과 함께 장춘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습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일본영사관 직원들, 그리고 일경 후발대와의 교전. 무려 7시간이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교전을 벌인 끝에 일본 군인과 경찰 60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얻어냅니다. 전투가 끝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생은 곧바로 시내로 들어가서 <일본만철병원>을 습격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를 놀라게 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제1급 사건으로 ‘의성단’ 진압작전을 전개했고, 만주에 있던 일본 경찰력과 밀정을 총동원하고 조선총독부 사무관 홍모를 파견해 선생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편강렬 선생은 오히려 일제를 조롱했는데 장춘 시내에“아사홍생 아생홍사”, 즉‘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는 벽보를 붙여 선생의 패기를 보여주었습니다.

1920년 초가 되자 선생은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924년 8월 선생은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군자금을 모집하러 하얼빈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에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를 조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새어나가 미리 잠복해 있던 일경에게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곧 거리를 가득 메우는 총성이 울려 퍼졌고, 결국 선생은 체포됩니다.

1924년8월22일 신의주로 끌려가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습니다. 수감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선생은 고문에 너무 시달려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골수에 맺힌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죽기 전 가족들은 시설이 좋은 일본 병원에 가서 치료받자고 했으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 내가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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